柳世根
世根1900. 12. 29 ~ 1956. 6.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8)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8) 1900년 12월 29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현 서산시) 운산면(雲山面) 거성리(巨城里)에서 태어났다. 해미면(海美面)에 위치한 해미공립보통학교(海美公立普通學校)에 진학하여 졸업한 뒤,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는 특별한 직업이 없는 상태로 해미에 거주하고 있었다. 기독교 신자로 활동하였다. 해미에서는 1919년 3월 19일 남상철(南相喆)의 주도로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후 3월 24일 이계성(李啓聖)과 김관룡(金寬龍)의 주도로 해미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해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해미저축조합(海美貯蓄組合)의 서기로 근무하고 있던 이계성은 3월 19일의 만세시위 이후 새로운 만세운동의 조직을 결의하였다. 천주교도 한병선(韓炳善)과 정(鄭) 신부로부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얻어 자신이 근무하는 저축조합에서 숙직을 하며 홀로 다량의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계성은 3월 24일 저녁 모교인 해미공립보통학교의 졸업생 고별식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당시 졸업하는 3학년의 학급반장이었던 김관룡(金寬龍)을 찾아가 “오늘밤 학생들 및 기독교도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권유하여 그의 동의를 얻었다. 이후 해미지역 기독교인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요청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온 이계성으로부터 만세운동의 취지를 듣고, 이에 기독교 신자로 같이 활동하던 김병선(金炳善)과 함께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3월 24일 저녁 7시 읍내의 음식점에서 열린 졸업생 고별식에서 김관룡은 참석자들에게 오늘 밤 만세시위가 전개될 것이라는 계획을 알리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에 졸업생 이봉이(李鳳伊)·유한종(劉漢鍾)·최흥량(崔興良), 재학생 장기남(張基南)·양태준(梁泰準)·이기신(李起信) 등 참석자 전원이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만세시위 참여를 결의하고, 고별식에 참석하지 않은 다른 학생들에게도 시위 계획을 전파하였다. 이날 밤 11시부터 해미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 및 주민들, 그리고 기독교계 인물들이 속속 읍내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계성과 김관룡의 지휘에 따라 읍내 뒷산으로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이계성이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이계성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열을 갖추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읍내로 내려왔다. 읍성의 남문과 서문을 지나 면사무소 앞과 우시장으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한독립만세’의 구호를 듣고, 만세시위에 공감한 지역의 주민들이 속속 동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다. 시위대가 해미주재소를 향해 행진하던 중 일제 경찰과 충돌하였다. 즉각 해산을 명령하는 일제 경찰에 맞서 이계성의 지휘에 따라 해산에 불응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더욱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의 무력 탄압에 의해 만세시위는 저지되었고, 200여 명의 참여자들이 주재소로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계성·김관룡·김연택(金然澤)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산경찰서에 구금되어 조사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점이 인정되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위협했다는 이유로 협박죄를 적용받아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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