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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선

吳敎善

1883. 3. 26 ~ 1948.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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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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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淸州)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청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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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미원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3년 3월 26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낭성면(琅城面) 성대리(城坮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같은 고향 출신 박우동(朴雨東)과 함께 1919년 3월 미원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청주군 미원면(米院面)의 미원장터에서는 3월 30일부터 3월 31일까지 이틀간 청주군 내에서 최대 규모의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날짜별로 주도 세력이 달랐다. 3월 30일 만세운동은 신경구(申敬求)·이용실(李容實)·이수란(李水蘭) 등이 주도하였다. 이날 1,500여 명의 만세시위대는 신경구·이용실·이수란 등의 지휘에 따라 일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에 대한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2명이 사망하고,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할 정도의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다음날인 3월 31일, 박우동과 함께 미원장터에서 재차 만세시위를 일으켜 주도하였다. 미원면에서는 이미 3월 말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전단이 뿌려지는 등 시위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3월 1일 이래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고향에서 평소 교류가 깊었던 박우동과 협의하여 만세시위를 결의한 것이다. 3월 30일 밤, 같은 마을 이상옥(李相玉)의 집에서 박우동과 만나 협의하여 다음날인 3월 31일 낭성면과 미원면 주민들에게 호소하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내일 미원리(米院里)로 와서 모두 만세를 부르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격문 3통을 작성하여 이상옥 외 2명에서 1통씩 배부하고, 이들에게 해당 문서의 내용을 낭성면과 미원면의 각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3월 31일 당일, 미원장터에 낭성면과 미원면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많은 주민들이 전날에 이어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다. 그러자 박우동과 함께 이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대를 형성하고, 이들을 지휘하여 미원장터 곳곳을 행진하며 큰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바로 전날의 격렬한 만세시위로 인해 일제 경찰과 헌병대의 시위 참여자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과 체포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많은 주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다음날인 4월 1일 새벽 1시경, 일제 경찰의 무력 탄압으로 시위대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지속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으로부터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7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항소가 기각되었다. 제2심 판결에도 불복하여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하는 의사 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다. 그런데 제1심 및 제2심에서 받은 유죄판결은 부당하여 복종할 수 없는 위법”이라는 취지로 상고하였으나,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10월의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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