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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金東鉉

1862. 4. 10 ~ 1939.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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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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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英陽)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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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김도현의진
  • · 선성의진
  • · 관동의진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6)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경옥(景玉)이다. 1862년 4월 10일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청초면(靑初面) 소청리(小靑里, 현 청기면(靑杞面) 상청리(上靑洞))에서 아버지 소경원(昭慶園) 참봉(參奉)을 지낸 김성하(金性河)와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趙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이다. 김도현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활동하였다. 가계로는 김녕 김씨金寧金氏 시조 김시흥(金時興)의 23세손이고, 사육신(四六臣)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 영양 입향조 김광필(金光弼)의 13세손이다. 10대조 정3품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김응상(金應祥) 이후 누대에 걸쳐 집안이 한미하였다. 그러나 조부 김하술(金夏述)과 부친 김성하에 이르러 천석지기의 가세를 일으킴으로써 향반(鄕班)의 지위를 회복하였던 것 같다. 참봉 김성하 또한 군자(君子)의 기상으로 자녀들을 항상 도(道)로써 가르쳤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영양 지역에서도 12월 10일 유림이 향회(鄕會)를 열고 창의에 관해 의논한 결과 안동(安東)과 예안(禮安) 지방의 상황을 살펴본 뒤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때 김도현(金道鉉)과 조영기(趙永基)가 선발되어 권세연(權世淵)이 이끄는 안동의진(安東義陣)과 이만도(李晩燾)가 이끄는 선성의진(宣城義陣)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김도현은 청량산(淸凉山)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1896년 1월 4일 김도현의 주도로 일가친척과 주민 등 10여 명과 함께 고향 영양(英陽)에서 출발하였다. 1월 5일 봉화군(奉化郡)의 청량산으로 들어가 대오(隊伍)를 정비하고 김도현을 대장으로 하는 청량의진(淸凉義陣)을 일으켰다. 의병부대는 당일 행군을 시작하였고, 이튿날인 1월 6일 봉화(奉化)로 진출하여 봉화군수의 지원을 받았다. 이어서 영주(榮州)와 예안을 거쳐 안동에 이르러 영호루(暎湖樓) 아래 낙동강 백사장에서 진법(陣法)을 훈련하였다. 의병부대 규모는 출진 후 계속 증가하여 수백 명의 진세를 형성하였다. 이후 선성의진(宣城義陣)과 합세하였다. 김도현은 선성의진의 중군장에 올랐다. 이 무렵 안동·선성·용궁(龍宮)·예천(醴泉)·영천(榮川)·풍기(豊基)·순흥(順興) 등 7개 군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함창(咸昌) 태봉(胎峯)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선성의진도 중군장 김도현의 주도 아래 장령 및 군사들과 함께 2월 15일 예천(醴泉) 산양(山陽)으로 진군하였다. 산양에 집결한 연합의진은 회맹(會盟)을 하고 2월 16일 태봉으로 출격하였다. 김도현이 이끄는 선성의진이 가장 먼저 도착하여 선봉에서 싸웠으나, 수차례 일본군의 기습적인 반격에 ‘7읍연합의진’은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도현은 “내 아우 경옥(景玉) 동현(東鉉)은 포를 쏘아 흑추(黑酋) 5명을 죽였다”(『창의전말』)라고 하였다. 이는 선성의진 초장(哨長) 이오동(李五同)이 적군 7명을 죽인 것과 함께 태봉전투에서 거둔 가장 큰 전과에 속한다. 태봉전투에서 패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김도현은 강릉의병장 민용호(閔龍鎬)의 요청으로 새로 꾸린 군사 60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관동의진(關東義陣)에 합세하였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경군(京軍)의 공격을 받아 패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1896년 5월 고향의 검각산성(劍角山城)을 수리하고 앞으로 있을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곧이어 관군이 공격해왔다. 김도현의 명을 받아 종형 김계현(金桂鉉) 등과 함께 이에 대적하였으나 형세에 밀려 청기면 저동(苧洞)으로 물러났다. 1896년 5월 김도현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영양으로 들어가 유진하던 중 관군이 온다는 정보에 선성의진 선봉장 이원여(李元汝)와 함께 군사 10여 명을 인솔하여 지세를 파악하고 그에게 마동(馬洞)을 막도록 하였다. 이때 관군 여러 명이 접근해 오자 김도현을 대신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이후 관군의 회유와 시세의 불리로 1896년 10월 15일 의병부대를 해산하자 함께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도현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려고 상경하였다가 1905년 (음)12월27일 귀가하여 각지에 통문을 보내는 한편, 영양읍 장터에도 방문(榜文)을 붙여 거의를 촉구하였다. 1906년 1월 2일 안동진위대 병사들과 일본군이 소청리(小靑里) 본가를 포위하였다. 여기서 종숙 김성수(金性洙)와 종형 김한현(金漢鉉)·김서현(金瑞鉉) 등과 함께 잡혀 4개월 동안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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