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식
安昌湜1886. 2. 11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수안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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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1886년 2월 11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안면(遂安面) 석교리(石橋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3일 수안군 만세시위를 계획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천도교는 각 지역 천도교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자 계획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이종일(李鍾一)의 지시를 받은 이경섭(李景燮)은 3월 1일 저녁에 수안면 석교리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서 수안천도교구장 안봉하(安鳳河)를 비롯해서 김영만(金永滿)·나찬홍(羅燦洪)·최용식(崔鎔植)·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楨)·한청일(韓淸一)을 만났다. 이경섭은 이들에게 만세운동 소식을 알림과 동시에 독립선언서 70장을 주면서 수안군 내의 만세시위를 독려하였다. 3월 2일 수안 천도교구실에 갔다. 교구실에는 안봉하를 비롯해서 평소 독립을 염원하던 김영만·나찬홍·최용식·김형선(金炯宣)·이달하(李達河)·나용일(羅容日)·장성도(張聖道)·홍두옥(洪斗玉)·홍길재(洪吉載)·이윤식(李潤植)·홍두익(洪斗益)·이영철·이응호(李應浩)·홍석정·한청일 등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3월 3일 수안 읍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수안헌병분대를 점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안봉하는 수안 천도교구실을 방문하는 천도교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한편 3월 2일 오후 3시경에 수안헌병분대장은 황해도 경무국장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그 전보에는 독립선언서가 서울에서 지방으로 유포되고 있다는 소식과 더불어 해당 지역의 천도교구실을 임의로 수색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그 날 저녁 수안헌병분대는 수안 천도교구실을 급습해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하였다. 그 결과 다른 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헌병분대로 연행되었다. 당시 교구실에 있던 이영철·홍석정·한청일은 헌병대의 연행을 피하였다. 이들은 3월 3일 수안읍내 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수안군 내 천도교인들에게 3월 3일 수안천도교구로 집결하도록 독려하였다. 3월 3일 오전 6시부터 수안군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1차로 태극기를 손에 든 한청일·홍석정·이영철의 지휘를 받으며 130~140명의 시위대가 행진하였다. 수안 금융조합에서 이영철의 연설이 끝나자, 시위대는 수안 헌병분대로 진격하였다. 헌병분대 앞에 도착한 시위대는 독립을 선언하면서 헌병분대 퇴거를 주장하였다. 한편 그 날 오전부터 수안 천도교구실에는 천도교인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오전 11시경에 이동욱과 오관옥은 2차로 천도교인 100여 명을 이끌고 수안헌병분대로 진출하였다. 시위대가 헌병분대 사무실로 진입하려고 하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사격하였으며, 그로 인해서 시위대 일부가 부상을 당하였다. 그러자 오후 1시경에 홍석정·한청일·오관옥은 3차로 15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수안헌병분대로 나아갔다. 시위대가 헌병분대 정문을 돌파하려고 하자, 일제 헌병은 재차 사격하였다. 그 자리에서 한청일과 홍석정은 즉사하였으며, 총탄을 맞은 오관옥 역시 사망하였다. 일제는 수안군 만세시위 참여자를 이른바 내란죄로 처벌하고자 하였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예심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여 경성지방법원 예심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그 해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 3월(미결구류일수 중 45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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