沈有先
有先1868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신남면 고토리 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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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함경남도 장진군(長津郡) 신남면(新南面) 중흥리(中興里)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형사사건부에 따르면 42세로, 1868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14일 장진군 신남면 고토리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平壤)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기독교·불교계 대표와 학생대표들은 만세시위와 독립선언서 낭독을 주도하고, 인편을 통해서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 지역으로 전파하여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였다. 함남 지방에서는 3월 초순 원산·영흥을 시작으로 함흥까지 만세시위가 확산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장진군에도 만세운동의 소식이 전해졌고, 3월 14일에는 신남면 고토리(古土里), 3월 19일에는 상남면(上南面) 덕실리(德實里)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 신남면 고토리에서는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이때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한영태(韓永泰)·한면각(韓冕珏)·이우승(李愚昇)·조희창(曺喜昌) 등이 시위대를 이끌었고, 시위대의 규모는 약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고토리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고, 고토리 헌병주재소 앞에서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헌병대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강경하게 진압하였다. 헌병대가 칼과 몽둥이로 시위대에 폭력을 행사하자,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헌병대의 무력 진압에 강경하게 저항하였다. 시위대의 규모에 수적으로 불리함을 느낀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서 사격을 가하였다. 시위대는 헌병대의 발포에 더욱 분노한 나머지 헌병주재소로 진입하였다. 시위대 일부는 함흥과 장진을 연결하는 전화선을 절단하였으며, 그 모습을 확인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시위대 2명이 사망하였다. 하지만 통신선 절단에 따른 고립을 느낀 헌병대는 헌병보조원을 하통리(下通里) 헌병주재소로 급파하였다. 그 곳에 도착한 고토리 헌병보조원은 시위대가 현병주재소로 진입하였다고 보고하였고, 보고를 접한 하통리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은 하갈리(下碣里) 헌병주재소의 헌병과 함께 고토리로 출동하였다. 하통리와 하갈리의 헌병대는 고토리 헌병주재소에 남아있던 시위대를 향해서 무력을 행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100여 명이 끌려갔다. 신남면 고토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군경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며 같은 해 8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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