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구
金東九미상 ~ 미상
관련 단체
- · 이석용 의진(이석용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출생지 및 출생 연월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활동 내용을 보아 전라북도 임실(任實)에서 출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동구(金銅九) 또는 김경구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과 함께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국권 상실이 현실화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전라도 각 지역에서도 의병부대가 결성되어 항일 전투를 펼쳐갔는데, 1907년 8월 26일 전북 진안에서 이석용이 거의토적(擧義討賊)을 내세워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당시 이석용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부대장으로서 임실과 남원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 활동을 하였다. 이석용 의병부대는 1907년 9월 13일 진안읍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당시 기삼연이 전라도 일대의 의병부대들을 결집하여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자 의병부대를 이끌고 이에 합류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을 맹주로 추대한 뒤 1907년 10월 말부터 다음해 1월 말까지 치열한 항일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주로 장성·영광·담양·고창·함평·무장 등 전라도 서부 지역을 활동무대로 하여 각 읍에 상주해 있던 순사주재소와 우편취급소, 거류 일본인들을 습격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대대적인 진압 작전으로 인해 1908년 2월 기삼연이 붙잡혀 사망한 뒤 여러 의병부대로 분진하여 소규모 유격전을 펼쳐갔다. 이때 이석용 의병부대도 분진하여 독자적으로 소규모 유격전을 펼쳤다. 동료 의병 20여 명을 이끌고 의병활동에 필요한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09년 4월 22일에 휘하의 김막동(金莫同)·김상천(金祥千)·박치근(朴致根)·한자선(韓子先)·박화숙(朴化淑)·최석봉(崔石奉) 등 20여 명을 이끌고 전북 옥구 성남면(城南面) 유촌(柳村)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같은 해 6월 7일 남원 아산방(亞山坊) 석문동(石門洞)과 신정리(新亭里)에서는 동장(洞長)의 가택을 습격하여 ‘우리는 의병인 바 군수금(軍需金)을 내라’라며 총으로 위협한 뒤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임실 덕치면(德峙面) 원촌리(遠村里)의 이장(里長)과 순창(淳昌) 구미리(九味里) 이장의 가택을 습격하여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였다. 10월 24일에는 김상천과 박영렬에게 지시하여 임실 하신덕면(下新德面) 물량리(勿梁里)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도록 하였다. 이때 김상천과 박영렬은 그곳에 거주하던 홍기화(洪奇化)와 김영오(金永五)의 가택을 습격한 뒤 창촉으로 이들을 위협하면서 “너는 기왕에 공금(公金) 영수원으로서 백성들로부터 많은 재물을 강제 징수하였으니 군수금(軍需金)을 내라”라며 군자금을 수집하였다. 이처럼 동료 의병들과 함께 남원과 임실 일대를 다니면서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김상천(징역 10년 형)·박영렬(징역 10년 형)·김막동(징역 7년 형)·최석봉(징역 7년 형)·양창서(징역 3년 형)·박치근(징역 1년6개월 형) 등 휘하 의병들이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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