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興洙
興洙1921. 6. 22 ~ 2016. 2. 1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윤독회
- · 다혁당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검거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921년 6월 22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운산면(雲山面) 고산리(古山里)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학자 집안의 자손으로, 외조부는 해미(海美) 군수를 지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10월 초순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8·9·10회생들과 “조직체를 형성하여 지속적으로 투쟁을 전개해야한다”라고 의견을 모은 뒤, 각 기별(期別)로 윤독회(輪讀會)를 조직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 문학서적을 돌려 읽고 월 1, 2회의 모임을 가졌다. 또한 같은 달 하순에는 박효준(朴孝濬)·이태길(李泰吉)·강두안(姜斗安)·문홍의(文洪義) 등과 함께 민족의식, 항일의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작품집을 상징적으로 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12월 중순까지 주로 8, 9회생들이 쓴 원고를 수집하여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약 200부 발간하였다. 『반딧불』에 실린 내용은 정지용(鄭芝溶)과 이광수(李光洙) 같은 기성 작가의 작품이 중심이었으나, 일부는 일반 학생들의 민족적 자각의 촉구와 계몽,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의 문예작품도 실렸다. 1940년 11월 23일 대구부(大邱府) 봉산정(鳳山町, 현 봉산동)에서 박효준·이태길·강두안·박찬웅(朴贊雄)·문홍의·이동우(李東雨)·김근배(金根培) 등과 함께 문예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문예부라는 명칭의 결사를 조직하였다. 문예부는 “부원은 비밀을 엄수하고, 매주 토요일 각자 작품을 지참하고 회합하여 서로 이를 감상, 비판할 것”을 운동방침으로 정하고, 1940년 11월 30일경부터 1941년 3월 9일경까지 약 9회 한글 시와 글 등을 발표, 감상, 비판하면서 민족문화 존중과 항일의식을 키웠다. 문예부와 대구사범학교의 또 다른 항일결사 조직인 ‘연구회’ 구성원들의 졸업이 임박해지자 조직을 새로운 방향으로 계승시키고자 1941년 2월 15일 거주하고 있던 대구부 대봉정(大鳳町)의 하숙집에서 동기생인 문홍의·이동우·박호건·권쾌복(權快福)·배학보(裵鶴甫)·최영백(崔營百)·이종악(李鍾岳)·서진구(徐鎭九)·이홍빈(李洪彬)·이주호(李柱鎬)·김효식(金孝植)·김성권(金聖權)·이도혁(李道赫)·문덕길(文德吉)·최대석(崔大碩) 등과 함께 비밀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고 문예창작 책임직을 맡았다. 다혁당은 문예부, 연구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문학, 미숙, 학술, 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하고 조국 독립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결사 투쟁함”을 목적으로 삼고, 교내의 항일 운동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사까지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대구사범학교 졸업을 앞두고 34명의 결사원들과 함께 졸업 후 책자를 전국 각지에 배포하도록 계획하는 등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1년 7월 말 『반딧불』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는 과정에서 5학년 여름방학 중인 8월 8일 고향 서산에서 붙잡혔다. 2년여의 미결 기간을 거쳐 1943년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겪다가 1945년 광복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박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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