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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화

金道和

1825. 9. 6 ~ 1912.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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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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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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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안동의병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25년 9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일직면(一直面) 구마동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庵)이다. 아버지는 김약수(金若洙), 어머니는 진양(晉陽) 정씨(鄭氏)이다. 처가는 고성 이씨로 그 자신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존고모부(尊姑母夫)이다. 안동 지역의 유림은 1895년 을미사변과 이어 일어난 단발령의 시행에 즉각적으로 의병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안동 지역에서 을미의병을 주도한 인물은 퇴계 이황을 종장으로 삼고 있는 유치명(柳致明)의 문인 중에서 다수 배출된 특징이 있다. 구한말 손꼽히는 대 문장가이자 실천적 도덕을 강행한 기개 높은 명유로 위정척사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대장으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유치명의 문인 중에 가장 적극적인 항일저항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유학자의 본분인 의리 정신을 발휘하였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1893년 천거에 의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제수받았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반포되자 72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안동의병을 이끌었다. 안동통문(安東通文)의 발의자 5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김흥락(金興洛)·유지호(柳止鎬)·곽종석(郭鍾錫) 등과 함께 논의를 주도한 결과 안동의병부대 결성을 결의하고 통문을 각지에 발송하였다. (음)12월 6일에 류도성(柳道性)·김흥락 등과 함께 봉화 유곡의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권세연은 연무당에서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의병의 기세에 눌려 1896년 (음)1월 7일에 안동을 빠져나가다가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에 체포되어 (음)1월 13일 문경의 농암 장터에서 처형되었다. 김석중이 이강년 의병부대에 의해 처단된 뒤, 신임 안동관찰사로 임명된 이남규(李南珪)는 상주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안동부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붕괴시키기 위한 공동작전이 필요해짐에 따라 안동의병부대는 봉화의병, 서상렬(徐相烈) 의병과 연합하였다. 이 시기 의병장 권세연이 사퇴하자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대장에 추대된 후 유난영(柳蘭榮)을 도총에 임명하고, 김흥락과 류도성을 지휘장으로 선임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였다. ‘창의진정소’를 올리고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 봉기의 동기가 을미사변과 단발령임을 밝히고 개화파들의 행적을 비판하였다. 개화당으로 대구관찰사 이중하의 측근으로 알려진 의성군수 이관영(李觀永)을 효수하였다. 영주·예안·봉화·의성·청송·예천·진보·영양 등지에 소모관을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진용을 확대하였다. 이 무렵 진주의병부대에 안동의병부대의 일부 병력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상렬 부대를 맞이하면서 연합 의병부대를 추진하고 (음)2월 7일 의병 200여 명을 거느리고 풍산에 집결하여 풍기·순흥·영천·봉화·선성·호서의병부대와 함께 예천으로 향하였다. 음력 2월 13일에 산양 장터에서 안동권 6개 의병부대와 호좌의병부대로 이루어진 7개 의병부대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연합 의병부대는 태봉을 공격하기 전에 예천군수 유인형(柳仁馨)을 참수하여 기세를 올렸다. 유인형은 개화파 관리로 서울에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온 경군을 접대한 죄로 처형되었다. 연합 의병부대와 일본군과의 전투는 15일 밤에 개시되었다. 의병은 태봉전투에서 일본군 약간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화력과 조직력의 열세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 직접 참가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중군 권문팔(權文八)이 안동의병부대를 이끌고 간 것은 확인된다. 태봉전투 패전 이후 3월 초에 봉정사로 의병부대를 옮기고 의병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최세윤(崔世允)을 좌익장으로, 김도현(金道鉉)을 부장으로, 서상렬을 군사에, 이긍연(李肯淵)을 종사관에, 권옥연(權玉淵)을 부장에 임명하는 등 편제를 개편하고 이천의병(利川義兵)과의 연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4월 초에 일본군의 봉정사 습격으로 패산하였다. 이후 김흥락, 하회 류씨 문중, 그리고 지역 사림에게 서신을 보내 협조를 부탁하였다. 고종이 장석용·정의묵·김근시를 파견하여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의병을 해산하지 않겠다는 격문을 보내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1896년 7월 이후 안동의병부대를 어떻게 유지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안동의병부대의 일부가 동해안 일대에서 활약했다는 단편적인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후 의병을 해산한 뒤, 정국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상소문과 격문을 발송하였다. 1905년 2월 을사늑약이 맺어질 때 「청파오조약소(請破五條約疏)」를 올려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청물합방소」를 올리고 「격고통감문」, 「재격고통감문」, 「포고각국공사관문」 등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 대문에 ‘합방대반대지가’라는 현판을 붙이고 사실상 가택연금 생활을 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의 열전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최익현·민영환전, 이재명전, 안중근·이준전, 김순흠전 등 4편으로 된 6명의 열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주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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