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언
梁希彦1894. 6. 10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17)
관련 사건
- · 강서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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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7) 1894년 6월 10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김제면(金祭面) 맥산리(麥山里, 현 금정리(金井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원장리(院場里, 현 평양시 시정노동자구)장터와 사천(沙川)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원장리와 사천장터가 위치한 상사리(上四里)의 행정구역은 각각 대동군과 강서군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서로 떨어진 거리가 약 25리에 불과한 이웃지역이었다. 원장리와 상사리 사이에는 5일장인 모락장이 섰고 이때 서로 왕래가 잦았다. 두 곳 모두 원장교회(院場敎會)·산수리교회(山水里敎會)·반석교회(盤石敎會)·사천교회(沙川敎會) 등 장로교회 소속 교회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강서군 만세시위는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1919년 3월 4일 전개된 원장리 장터와 사천장터 만세시위는 강서군 반석면 반육리(班六里) 반석교회 장로이자, 사립 반석학교(盤石學校) 설립자인 조진탁(曺振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개인적인 용무로 1919년 2월 28일 평양을 방문한 조진탁은 다음날인 3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과 평양 시내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반석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으로 「독립선언문」 여러 매를 얻어 돌아왔다. 이어 원장교회·반석교회·산수리교회의 교직자들과 함께 원장리와 상사리 연합 만세시위를 준비하면서 인근에 있는 모락장교회에도 만세시위 계획을 알렸다. 만세시위의 구체적인 준비는 원장교회의 장로이자 원장리 합성학교(合成學校)의 교감인 임이걸(林利杰)의 주도 아래 합성학교(合成學校) 교직원과 학생들이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문」을 인쇄하면서 진행되었다. 한편 강서군 상사리에서는 급속하게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중 별도의 시위를 추진하던 모락장교회의 계획이 일제 헌병대에 발각되었다. 모락장교회 목사 송현근(宋賢根)은 피신하고 김해진(金海鎭)을 비롯한 교회 간부 10여 명이 붙잡혔지만, 원장리를 중심으로 3월 4일 만세시위 준비를 중단 없이 추진하였다. 이때 만세시위에 함께하자는 연락을 받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3월 4일 아침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가 예정된 합성학교로 갔다. 만세시위가 예정된 10시 정각에 각 교회의 기독교인들을 비롯하여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독립을 위한 기도와 「독립선언문」 낭독, 만세시위를 격려하는 연설을 끝으로 평화적 시위를 시작하였다. 대형 태극기와 나팔수를 앞세우고, 그 뒤로 시위 대열이 행진할 때 합성학교에서 배포한 태극기를 받아 쥐고 참여하였다. 선두에 선 주도자들의 선창에 따라 힘을 주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원장시장을 향해 행진해 나갔다. 많은 주민들이 장터에서 외치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를 듣고 만세시위 현장을 목격하고, 시위에 호응하여 참여해 왔다. 다시 합성학교 교정으로 돌아왔을 때는 보통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수천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원장리장터의 만세시위가 고조되자 반석교회 장로 최능현(崔能賢)과 모락장교회 목사 송현근은 시위대를 향해 사천장터의 만세시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동지들이 일제 헌병대의 유치장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을 구출하자고 호소하였다. 이에 원장리 장터의 만세시위대는 그 자리에서 즉시 최능현 등의 제안에 동의하여 사천장터 만세시위를 계획하다가 붙잡힌 10여 명의 동지들을 구출하기로 결정하였다. 만세시위대는 즉시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의 사천장터를 향하여 대형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며 행진하였다. 대규모의 만세시위대가 사천시장을 향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일제 헌병대는 시장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시위 대열이 사천시장으로 진입하자 무차별적으로 사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사상자들이 발생하였다. 이때 일제 헌병의 만행에 분노한 주민들과 함께 투석전으로 일제 헌병에 대응하며 계속하여 시장으로 진입하였다. 시장 근처에 위치한 일제 헌병의 숙소에 불을 질러 모두 태우고, 마침내 탄약이 떨어져 도망하는 일제 헌병주재소장과 헌병 보조원 3명 모두 잡아 처단하는데 동참하였다. 이와 같은 투쟁을 통해 상사리에서 붙잡혔던 10여 명의 만세시위 동지들을 모두 무사히 구출하였으나, 이날 현장에서 시위대 19명이 사망했으며 부상자는 40여 명에 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일제 경찰 처단 등의 격렬한 시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8월 13일 평양지방법원으로부터 이른바 살인죄·방화죄·소요죄와 보안법 위반 등의 이유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11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2심 판결에도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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