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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在明

在明

1891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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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沈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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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용강(龍岡)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용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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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7)

관련 사건

  • · 용강군 용월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7)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용월면(龍月面) 대영리(大永里)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29세로, 1891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일어난 용강군 용월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용강군은 1890년대부터 기독교가 전파된 지역으로, 특히 1898년 안창호(安昌浩)가 용강군 일대에서 전도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용강군 유지들은 지운면(池雲面) 진지리(眞地里, 1914년 이후 진지동)에 장로교 계통의 진지동 교회, 1899년에는 감리교 계통의 광량만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기독교 교회들은 부설 학교를 건립함으로써 신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나섰다. 기독교 뿐 아니라 천도교도 용강군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천도교는 진지리와 용월면 계명리에 전교소를 세웠다. 1919년 만세 운동의 민족대표 유암(游庵) 홍기조(洪基兆)는 홍경래의 후손이자 용강군 오신면(吾新面) 하양리 출신의 천도교 인사로서 교주 손병희(孫秉熙) 밑의 최교 교직인 도사(道師)직을 수행하였다. 천도교 인사들은 용강군의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천도교 전도에 힘을 썼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에서 만세시위가 일제히 일어났다. 그 중에서 평양(平壤)과 진남포(鎭南浦)는 용강군과 가까운 지역이었다. 만세운동의 발발과 독립선언서 선언을 주도한 이들은 학생대표와 더불어 기독교와 천도교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인편을 통해서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 지역으로 전달함으로써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용강군은 지역적, 종교적 기반이 갖춰져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일찍부터 고조된 곳이었다. 독립선언서도 일찍부터 전달되어 용강군의 만세시위는 3월 초순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용강군에서 만세시위가 처음 시작된 지역은 3월 2일, 기독교 교회와 학교가 위치해 있었던 용강읍과 진지동이었다. 3월 2일을 시작으로 용강군에서는 장날을 이용해서 개신교 교인들과 천도교인이 밀접한 동네 단위로 크고 작은 만세시위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1919년 3월 5일 밤 9시 용월면 대영리에서 노삼환(盧三煥)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늦은 밤 동네 주민들과 술을 마시던 중 시위대의 함성소리를 듣고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용월면 대영리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마을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또한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려하는 일제 군경과 맞서 싸웠다. 용월면의 만세시위는 3월 6일에도 지속되었다. 노삼환은 대영리 주민들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친 후, 마동리로 이동해서 마동리 주민들과 합세해서 마산시장(馬山市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제 군경에 의해서 용월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지방법원 재판을 거쳐 1919년 6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재차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7월 2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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