陸學林
學林1901. 1. 21 ~ 1945. 8.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임명청년회(臨溟靑年會) 상의향청년연합회(尙義鄕靑年聯合會)동만청년연맹(東滿靑年聯盟)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5)
관련 사건
- ·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재조직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5) 1901년 1월 21일 함경북도 길주군(吉州郡) 웅평면(雄坪面) 용천리(龍川里)에서 태어났다. 한자가 다른 이명으로 육학림(陸鶴林)이 있으며,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육천학림(陸川學林)을 썼다. 1921년부터 2년간 회령공립보통학교(會寧公立普通學校) 훈도로 재직하였다. 1921년 3월 김낙섭(金洛燮) 등의 발기로 임명구락부(臨溟俱樂部)가 새로 창립되자 임명구락부장을 맡았으며 당시 구락부원은 30여 명이었다. 설립 이후 당국의 주목과 간섭을 받게 되면서 임명구락부가 1922년 7월 임명청년회(臨溟靑年會)로 개편하였을 때, 부회장으로서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성진사립보신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24년 7월 5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청진형무소에서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1925년 7월 26일 만기출소로 풀려났다. 풀려난 후 만주지역으로 건너가 1926년 4월 18일 설립된 옌지현(延吉縣)의 상의향(尙義鄕) 청년연합회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합리적 사회생활의 단체교육과 실지훈련’ 및 ‘상호부조의 정신을 통한 일치단결’을 강령으로 하는 상의향 청년연합회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일제는 상의향 청년연합회에 대해 동만청년연맹(東滿靑年聯盟)의 지회로 평가하였는데, 상의향 청년연합회의 강령이 1926년 1월 25일 창립한 동만청년연맹의 강령과 거의 동일하였기 때문이다. 1926년 7월 21일 상의향 청년연합회가 해우(海友) 청년회 등 6개 단체와 함께 동만청년연맹에 가맹하였을 때, 동만청년연맹의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 동만청년연맹의 가맹단체인 해우청년회가 경영하는 무산아동야학원(無産兒童夜學院)이 개최하는 야학원 대강연회에서 ‘생(生)을 나변(那邊)에 구(救)할까?’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한편, 그와 함께 강연을 펼친 사람으로는 이인구(李麟求)와 주채희(朱埰熙)가 있는데, 이들 역시 동만청년연맹의 상무위원과 후보위원이었다. 이어 10월에는 동만청년연맹 제1회 임시대회가 용정시 간도극장에서 개최될 때, 용정청년연맹 외 간도지역 57개 단체의 대표 40여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위원장을 맡았다. 위원장으로서 개회사와 회계보고, 총회 이래의 경과기록을 낭독하였으며, 대회의 진행을 맡았다. 이 대회에서는 청년운동과 관련하여 ‘계급적 청년단체의 촉진’과 ‘민중본위의 강연 개최’, ‘사회과학 연구와 과학사상 보급’, ‘독서회의 조직’ ‘국제무산청년일을 청년기념일로 할 것’ 등 사회주의 운동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 여러 정책을 결의하였다. 1927년 10월 경상북도 김천군(金泉郡)에 위치한 불교세계사(佛敎世界社)의 주간 박경순(朴景淳)을 찾아가 직지사(直指寺)에서 1~2개월가량 머무를 수 있도록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나, 대구로 가는 길에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이후 도쿄(東京)로 건너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3월 29일 우에노(上野) 공원 자치회관에서 열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도쿄조선노동조합 제3회 정기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는 도쿄조선노동조합의 운동방침과 반전동맹(反戰同盟) 지지 등 20여건이 결의되었다. 이 일로 1928년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이후 일본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고자 한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위원이자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일본부(日本部)의 책임비서였던 인정식(印貞植)과 지린(吉林)에서 건너온 박문병(朴文秉)에게 주목받게 되었고, 이들의 권유로 1929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 입회하였다. 이후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동경구역국(東京區域局)의 선전부 책임이 되어 10회 이상 관련 회의에 참여하였다. 선전부에서는 선전부장 박문병의 지휘 아래 잡지 『현단계(現段階)』를 『노동농민신문(勞動農民新聞)』으로 개제(改題)하고, 『레닌주의』라는 제목의 잡지를 발행하여 이 둘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의 기관지로 만들 계획을 수립하였다. 『레닌주의』 제1호에는 조재홍(曺在洪)이 번역한 「(1928년 8월 국제공산당 제6회 대회에서의 채용된) 식민지 및 반식민지에서의 혁명운동에 관한 테제」, 「조선문제에 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정서」가 실렸는데, 선전부원으로서 이 번역문을 사용하여 조직원을 지도하였다. 동시에 도쿄조선노동조합의 담당자로서 동 조직의 활동상황을 조직부 책임인 김동훈(金東訓)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1929년 4월말부터 계획되어온 여러 투쟁활동이 발각되어 1929년 8월 박문병·김동훈을 비롯한 다수의 동지와 함께 붙잡혔다. 1932년 10월 28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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