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在佑
在佑1919. 5. 29 ~ 1951. 11.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여우회(麗友會)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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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19년 5월 29일 서울 종로(鍾路) 숭인동(崇仁洞)에서 태어났다. 1936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山口)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유학생활 중 여우회(麗友會)에서 활동하였다. 여우회는 ‘고려의 벗’이라는 뜻으로, 1933년 야마구치현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친목단체로서 설립되었다. 회장으로 야마구치고등학교 학생을 추대하였으며 매년 신입생 환영회와 졸업생 송별회 등을 열었다. 1939년 2월 여우회의 회장이 되어 여우회의 성격을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운동단체로 바꾸었다. 전임 여우회 회장이었던 성창환(成昌煥)·민병구(閔炳久)·강석린(姜錫麟) 및 동급생 이경용(李鏡龍)과 함께 여우회를 한국민족의 독립·해방운동의 중심 모체로 만들고자 하였다. 당시 이들은 한국 민족이 일본의 통치하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피압박민족 겸 프롤레타리아로 압박과 착취의 이중고를 겪고 있으며, 이러한 질곡에서의 해방은 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 때 이루어진다고 인식하였다. 또한 중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국제적 고립에 빠지고 나아가 재정적 압박에 의해 혼란해져 결국 전쟁에서 패할 것으로 보고, 일반 민중을 지도할 동지를 결집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1939년 9월 29일 일왕을 비난한 글을 일기장에 쓴 일을 빌미로 옥고를 겪었다. 그 해 10월 여우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민족주의 계몽활동을 펼치기 위해 연락하였다. 12월 25일 부산의 봉래각(蓬萊閣)에서 열린 졸업생 송별회에서 동지들과 장래 한국독립을 위해 신명(身命)을 걸고 투쟁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 자리에는 민병구·성창환·황계주(黃啓周) 등 15인이 참석하였다. 1940년 4월 개최된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신입생 일부가 언급한 ‘내선일체’에 대해 이를 통렬히 비판하고 이 모임을 계기로 민족독립을 위해 일치단결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활동 끝에 1940년 7월 전·현직 여우회원 18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그 중 여섯 명의 동지와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41년 7월 25일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불경죄로 기소되었다. 같은 해 9월 3일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복 후 경기도 부천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6·25전쟁 발발과 함께 소위로 참전하였으며, 1951년 11월 18일 전쟁 중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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