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서
安致西미상 ~ 미상
관련 단체
- · 호좌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00)
관련 사건
- · 전기의병(호좌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0)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역과 생몰년월일, 집안 내력 및 성장 과정 등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포군으로서 의병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호좌의병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포군으로서 활약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실시된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날 때 원주(原州)는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이 유인석(柳麟錫)을 강원도 영월(寧越)에서 의병장으로 추대하면서 원주의병을 호좌의병부대로 확대, 재편하였다.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병부대는 연합의병으로 강원도·충청도·경기도 일대의 의병들이 참여하였는데, 이때 호좌의병부대의 핵심 전투력인 포군(砲軍)으로 참여하였다. 영월에서 출범한 호좌의병부대는 제천을 의병부대의 근거지로 삼고자 이동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최일선에서 호좌의병부대의 제천 입성을 이끌었다. 제천에서 부대 정비를 마친 호좌의병부대는 충주성(忠州城) 공략에 들어가 1896년 2월 중부지방의 전략적 요충지이며 관찰부인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때도 포군으로 충주성 점령의 최일선에 있었다. 또한 전보의 통신수단이었던 전신주를 파괴하였고, 충주 수안보(水安堡)와 가흥(佳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수비대에 대한 공격을 시도할 때도 핵심으로 전투를 이끌었다. 호좌의병부대가 전성기에 있을 때 주로 공격 최일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호좌의병부대가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을 받아 충주성에서 후퇴하고, 근거지인 제천마저 공격을 받는 상황이 일어나면서 관군과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방어해야하는 역할로 전환되었다. 호좌의병부대는 재기를 위해 서북행을 결정하고 원주를 거쳐 평안도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서북지방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자 중국 랴오둥(遼東)으로 건너가 의병근거지를 만들어 장기항전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강원도 안변군(安邊郡)의 영풍(永豐)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법지(法池)·양덕(陽德)·청간(淸澗)·영흥(永興)을 거쳐 양덕의 구창(舊倉)·맹산(孟山)·덕천(德川)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전투병력으로 호좌의병부대가 안전하게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선봉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실질적인 전투조직으로 부대를 재편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중군(中軍)을 선봉장 김용준(金容俊), 독전장(督戰將) 조후룡(趙後龍), 총독(總督) 조달승(曺達承)을 각각 부대장으로 하고 독자적인 작전권을 가진 예하 독립부대로 재편하였고 여기에 소속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덕천에서 부대재편을 마친 후 군악(軍樂)·청도(靑渡)·영변(寧邊)을 거쳐 운산(雲山)에 도착하였다. 운산에 도착한 직후 관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투가 크게 일어났는데, 선두에 앞장서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호좌의병부대는 다시 행군을 시작하여 관군의 계속된 공격을 뚫고 1896년 8월 24일 압록강변의 초산(楚山)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호좌의병부대가 강계부(江界府)에 진입했을 때 관군의 공격을 받고 전열이 흐트러진 상황에서 관군에 붙잡혔다. 붙잡힌 이후 재판과정을 거쳐 사형에 처해져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심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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