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학
安載學1852. 9. 16 ~ 1912. 2.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천수창의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전기의병(이천수창의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1852년 9월 16일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경기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이 공포되자 김하락(金河洛)을 중심으로 조성학(趙性學)·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이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이천(利川)으로 이동하였다. 이천에 도착한 이들은 포군 도령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을 불러 포군명부에서 포군 100여 명을 징발하여 여러 부대로 나눠 의병모집에 나섰다. 구연영은 2개 대의 포군을 이끌고 양근(楊根, 현 양평군 양평읍)·지평(砥平, 현 양평군 지평면)으로, 조성학은 2개 대의 포군을 거느리고 광주로, 김태원은 안성(安城)으로, 신용희는 음죽(陰竹, 현 이천시)으로 파견하였다. 이 때 김하락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런데 안성에서는 이미 민승천(閔承天)이 의병을 일으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기에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민승천을 의병대장으로 하는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가 출범하였다. 이 때 이천수창의소에서 각군 도지휘 김하락의 종사(從事)에 임명되었다. 1896년 1월 18일 김하락을 보좌하여 백현(魄峴, 이천 널고개)에서 일본군수비대를 상대로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그 해 2월 13일 서울에서 파견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여 이천창의소가 흩어지게 되자 김하락과 함께 여주(驪州)로 이동하여 여주의병과 연합의병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 결과 여주·광주·이천 등지의 의병부대와 연합의병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경기의병이 결성되고 병력을 광주 이현(利峴)으로 이동시켰다. 이천수창의소도 흩어졌던 병력을 수습하여 같은 해 2월 25일 이현으로 집결하였다. 광주 이현에 모인 의병은 2천여 명으로 대규모 연합의병부대가 출범하였다. 광주에 집결한 연합의병은 부대편제를 재편하였다. 의병대장에는 박준영(朴準英)을 추대하고 선봉장에 김태원, 여주대장에 심상희(沈相禧), 중군장에 구연영, 군사(軍師)겸 지휘장에 김하락, 좌군장에 김귀성(金貴星), 후군장에 신용희(申龍熙) 등을 임명하였다. 재편된 연합의병에서도 김하락의 종사로 선임되었다. 1896년 2월 28일 연합의병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대비하면서 김하락을 보좌하여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으로 새롭게 들어선 정부는 의병 해산을 요구하는 선유조칙(宣諭詔勅)을 내놓으면서 상황이 변화였다. 결국 좌군장 김귀성의 배신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관군에 패하여 남한산성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남한산성에서 나와 의병부대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김하락을 이천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영남으로 이동하였다. 1896년 4월 28일 의성(義城)에 도착한 이천의병은 의성의병장 김상종(金象鍾)의 요청에 따라 같은 해 5월 13일 이천의병·의성의병·청송(靑松)의병을 주축으로 의성연합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연합의병을 결성하는 과정에서도 종사로 선임되어 김하락 의병장을 보좌하여 주요 전투를 전개하였다. 연합의병은 그다음 날인 5월 14일 청송군 감은리(甘隱里, 城隍峴)에서 관군 170여 명과 첫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 해 5월 25일에는 의성 비봉산(飛鳳山)에서 100여 명의 관군을 상대로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6월 15일 경주(慶州)로 이동하였다. 경주로 들어온 이천의병은 경주지역의 유림 김병문(金炳文)·이시민(李時敏)·서두표(徐斗杓)·박승교(朴承敎) 등 여러 명과 협의해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그리하여 김하락·조성학 등과 함께 의병지도부를 구성하였다. 그런데 경주에서 구성된 연합의병에서는 일선부대장인 좌익장(右翼將)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최일선에서 의병을 이끌게 되었고, 그 결과 6월 17일 연합의병이 경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6월 23일 일본군수비대와 대구부(大邱府)와 안동진위대(安東鎭衛隊)의 반격을 받아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경주성이 함락되었다. 경주성 전투에서 패한 이천의병은 영덕(盈德)방면으로 이동하였다. 1896년 7월 14일에는 영덕에서 영해(寧海, 현 영덕군 영해면)로 가던 중 영덕의 남천(南川)에서 또 다시 관군과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도 앞장서서 싸웠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크게 패하고 말았다. 더욱이 김하락 의병장이 중상을 입는 피해를 입었다. 김하락 의병장은 패배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영덕 오십천(五十川)에 투신하여 사망하였다. 의병장을 잃은 뒤 무너지고 있던 의병부대를 수습하여 산발적이긴 하지만 약 1달간 의병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심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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