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흥빈
吳興彬1919. 11. 15 ~ 1990. 12. 2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구국청년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19년 11월 15일 함경남도 안변군(安邊郡) 석왕사면(釋王寺面) 풍포리(豊浦里)에서 태어났다. 평소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 고통 받는 한국인의 현실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일제가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뒤 그 책임을 한국에 가중시키는 태도에 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전장이 중국 전체로 확대되면서 일제는 안정적인 병력의 보급을 위해 한국에서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인력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징집 대상을 나이 어린 학생들로 확대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1943년 ‘학도지원병’이라는 명칭 아래 학생들의 재학 기간을 단축하고 징집 연기를 폐지하였으며,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에 기초하여 1943년 10월 「소화18년(1943년도) 육군 특별 지원병 임시 채용 규칙」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징병 검사에 통과한 한국인 학생들은 일제 군대로 동원되었다. 이것은 명목상으로는 ‘지원’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었으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학생들에게 입영 후 지원 서류를 제출하게 하는 등 강제 동원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당시 일제의 군사 동원 정책에 반대하여 지원병 응모를 강하게 거부하였으나 1943년 12월 22일 강제로 경설특설지원병훈련소(京城特設志願兵訓練所)에 입소한 뒤 1주일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곳에서 함경남도 신흥군(新興郡) 출신의 이용겸(李容謙)과 만나 교류하면서 일제의 전시통제와 군사동원 정책의 부당함에 관해 토로하였다. 또 서로의 민족정신을 고취하면서 한국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군사 훈련을 마친 뒤 육군 서부18부대로 배치되었음을 알리는 입영증서를 받았으나 불응하였다. 그리고 이용겸과 만나 구국청년회(救國靑年會)라는 항일단체를 조직한 뒤 간사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투쟁에 나섰다. 회원을 모집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구국청년회 회원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국제정세에 관해 의논하면서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때 연합군의 공격으로 인해 일본군이 전선에서 고전하는 현실을 파악하고, 일제는 반드시 전쟁에서 패배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운 뒤 거사에 참여할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항일투쟁을 호소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발송하는 등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항일 투쟁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에 조직 활동이 발각되어 1944년 3월 5일 이용겸과 함께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수감 중에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조영윤⋮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