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규현
尹圭鉉1894. 11. 27 ~ 1965. 10. 1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8)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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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8) 1894년 11월 27일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가회면(佳會面) 함방리(含芳里)에서 지역 유림을 대표했던 현제(弦齊) 윤병모(尹炳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합천군 만세운동의 시작점이었던 3월 18일 삼가면 읍내 만세시위와 정점이었던 3월 23일 삼가시장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합천군 삼가면의 만세운동은 고종 장례에 참여하고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접한 지역 인사들이 독립선언서를 전하면서 시작되었다. 김상준(金相峻)과 함께 상경하였다가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가하였다. 그리고 만세시위를 도모하기 위하여 한필동(韓弼東)·허동규(許東奎)·윤승현(尹承鉉)·허장(許鏘)·한식동(韓湜東) 등을 동지로 규합하고, 면내 각 마을의 대중 동원을 위해 움직였다. 만세운동 주도자들은 가회면의 김홍석(金洪錫)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윤재현(尹在鉉)의 서재에서 거사 당일 군중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고, 태극기는 허장의 집에서 만들었다. 그리고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도 취하였다. 1919년 3월 18일은 삼가시장의 장날이었다. 삼가시장 전면 중앙 언덕위에서 오후 1시경부터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가회면과 백산면(栢山面), 상백면(上栢面)의 주민들을 중심으로 300~400명의 군중들과 함께 밤까지 치열하게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함안경찰서의 경찰병력과 일본인 재향 군인들이 시위 진압에 가세하면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시위를 함께 주도하였던 한필동 등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다행히 피신할 수 있었다. 삼가면 만세시위가 해산된 이후에도 일본 군경의 검거를 피한 주도자들과 함께 다음 장날인 3월 23일 재차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리고 보다 많은 주민들을 동원하기 위해 합천의 각 지역을 돌며 참여를 권유하는 등 조직적인 동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거사 당일인 1919년 3월 23일, 만세시위는 이른 아침 백산면에서 시작되었다. 3,0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백산면사무소를 불태운 후 상백면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에서 합세한 면민들과 함께 다시 삼가면으로 나아갔다. 이때 가회면 시위군중을 이끌고 삼가면으로 행진하였다. 읍내 객사(客舍) 바깥채인 정금당(淨襟堂)에는 합천군 각 면에서 모인 군중과 인근 의령군 주민들까지 가세하여 13,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어서 군중 집회가 즉석에서 열렸고, 각 지역의 대표자와 시위 주도자들이 연단에 서서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고 군중들과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엄청난 군중들이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이어가자, 당황한 일본군 헌병이 연설을 진행하던 임종봉(林鍾鳳)에게 발포하였다. 이에 흥분한 시위 군중들은 물리력을 행사하며 주재소·우편소 등을 공격하였고, 이때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지휘하였다. 하지만 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일제 군경의 무차별적인 발포로 현장에서만 13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일제 군경의 야만적인 진압 작전에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부 시위 군중은 지역으로 돌아가 밤까지 시위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시위 당일 일본군의 탄압은 다행히 피할 수 있었으나, 시위 주도자로 결국 일본 군경에게 붙잡혔고, 김태현(金台鉉)·이계엽(李啓燁) 등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가혹한 조사를 받은 후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1919년 9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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