陸昌柱
昌柱1886. 12. 28 ~ 1950. 5.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05)
관련 사건
- · 옥천군 이원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5) 1886년 12월 28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수묵리(水墨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고, 육창문(陸昌文), 허상구(許相球) 등과 함께 1919년 3월 27일에 일어난 옥천군 이원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2월말 경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해 육창문·허상구 등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체류하고 있던 10일 동안 인산 참례와 함께 3월 1일 이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또한 만세시위 과정에서 서울만이 아니라, 평양(平壤)·원산(元山) 등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과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와 관련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講和會議)에서 영국과 미국 양국의 노력으로 한국의 독립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육창문·허상구와 함께 귀향하여 향리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귀향하자마자 같은 마을에서 평소 교류가 깊었던 친구 김용이(金龍伊)를 동지로 규합하였다. 허상구는 서울에서 경험한 만세운동의 상황과 이원의 만세운동 계획을 부친 허훈(許訓)과 친형 허상기(許相基)에 알려 그들로부터 이해와 허락을 받았다. 허상기는 그 자리에서 즉시 만세운동 준비에 동지로 결합하였다. 3월 15일 육창문의 자택에서 허상기 등과 함께 만세운동 계획을 확정하기 위한 비밀 모임을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서로 의견 교환을 통해 만세운동 거사일을 이원장터의 장날인 3월 27일로 결정하고, 만세시위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만세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주민이 있다면 강제로 참여시키고, 만약 헌병이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제지한다면 모두 헌병주재소로 이동할 것, 또 구금자가 발생하면 무리가 있더라도 구금자를 반드시 탈환할 것, 그것이 불가할 때는 헌병대에서 해산하지 않을 것 등을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 후 곧바로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던 광목으로 만세시위에서 사용할 대형 태극기 3본과 ‘독립만세’라는 글귀를 쓴 깃발을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오후 1시 경 허상기와 함께 흰 광목에 ‘독립만세’라 크게 쓴 깃발을 들고 시장의 동쪽과 서쪽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후 장터에 나온 주민들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도자들과 주변의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의 행동에 공감한 수백 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여 일제히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호응하였다. 주도자들과 함께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이원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에서 수백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기시모토 리사쿠(岸本理作) 등의 일제 헌병대가 곧바로 출동하였다. 기시모토는 고압적인 자세로 만세시위의 즉시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사전에 결정한 행동지침대로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지속하였다. 만세시위대의 강경한 자세를 확인한 일제 헌병들은 곧바로 총검을 들이대며 태극기를 압수하고, 만세시위의 주도 인물을 파악하여 체포하였다. 이때 허상기와 함께 붙잡혀 헌병주재소로 끌려갔다. 이후 주도 인물 중 체포되지 않은 김용이·허상구 등이 사전에 결정한 행동 지침대로 분노한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헌병주재소 앞으로 가서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헌병대는 연행자 석방 요구에 불응하고, 만세시위대를 향해 총기를 발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선두에서 일제 헌병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던 이일만(李一萬)의 동생이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만세시위대는 사망자가 발생한 황망함 속에 일단 철수하였으나, 오후 3시경 이일만이 죽은 동생의 유해를 주재소로 운구하여 항의함에 1,0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다시 헌병주재소 앞으로 나가 항의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에도 일제 헌병들은 여전히 총기를 발포하여 무력으로 만세시위를 탄압함에 격앙된 만세시위대는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김수원(金壽遠)·차기시(車奇矢) 등의 만세시위대는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일제 헌병들을 구타하여 무력화시키고, 유치장 담벽을 파괴하였다. 이때 만세시위대의 도움으로 허상기와 함께 구출되어 다시 만세시위대를 선두에서 지휘하였으나, 곧이어 옥천읍(沃川邑)과 대전(大田)에서 지원 병력으로 파견된 일제 헌병대에 의해 다시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대의 무차별 발포로 2명이 사망하고, 상당수의 주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일제 헌병도 1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일제 헌병대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의 주도 인물로 인정되어 허상기·김용이 등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5월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5년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의 일부는 취소되었으나, 여전히 징역 5년이 유지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 해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5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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