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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홍

安圭洪

1879. 4. 10 ~ 1910.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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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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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寶城)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보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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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안규홍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79년 (음)4월 10일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보성읍(寶城邑) 우산리(牛山里) 택촌(宅村)에서 안달환(安達煥)과 부실(副室) 정씨(鄭氏)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해방 후 후인들이 담산(澹山)이라 호했는데 담사리(꼬마머슴)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명이 많은 편으로, 계홍(桂洪) 제홍(濟弘) 계원(桂源)은 잘못 불려진 것이고 기언(基彦)과 덕봉(德峰)은 자이거나 가명으로 추정된다. 1882년 11월 부친이 사망하자 모친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보성군 봉덕면(鳳德面, 현 文德面) 법화(法化) 마을의 박제현(朴濟鉉)의 집으로 옮겼다. 박제현은 상당한 부농인데다 고종(姑從) 4촌이었기 때문이다. 모친은 박제현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해주며 세 식구의 호구를 해결하였다. 아직 소년티가 가시기 전에 꼬마머슴을 시작해서 안씨 성의 꼬마머슴이란 의미로 안담사리라 불렀다. 차츰 나이가 들어서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고용살이로 어머니를 모셨기 때문에 효자로 알려졌다. 이후 의병에 참여하기 전까지 무려 20여 년간이나 머슴살이를 계속하였지만, 강직하고 호방한 성품의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러한 성품으로 인해 간혹 의협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데, 세금을 독촉하는 하급관리를 혼낸 일화가 전해진다. 1907년 후반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크게 확산되자, 일제는 의병을 막기 위해 그해 11월부터 전국의 각 면 단위까지 자위단(自衛團)을 만들었다. 이 무렵 보성 법화마을에도 자위단이 조직되자, 자위단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일제 기록에는 1907년에 단발을 하고 일진회원(一進會員)이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일제는 자위단을 방도조직(防盜組織)이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의병을 방어하기 위한 단체였다. 따라서 자위단의 목적과 활동이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조직을 오히려 의병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 같다. 1백여 명의 머슴을 불러 모아 연설하기를, “우리가 남의 집의 고용이나 국민이기는 일반인데 나라 일이 위급한 때를 당해서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 것인가” 하면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동참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거나 머슴들이었다. 양반 유생들에게도 거병 사실을 알려 도움을 요청했으나 신분의 미천함을 들어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고향을 떠나 순천(順天)으로 이동하여 강용언(姜龍彦, 일명 姜性仁)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강원도의 해산군인 출신으로 추정되는 강용언은 일제의 진압을 피해 전라도로 이동하여 순천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었다. 강용언은 수십 명을 통솔하며 순천 조계산(曹溪山)에 근거지를 구축하여 활동하였다. 강용언 부대로의 합류는 크게 환영받았다. 지리적 환경과 지역 사정에 어두운 자신들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용언은 부장(副將)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강용언은 듣던 바와는 달리 주민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끼쳤다. 강용언의 비행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손덕오(孫德五)·염인서(廉仁瑞) 등 보성 출신의 의병들과 함께 1908년 4월 초 강용언을 총살하였다. 이어 부하 약 50명의 추대로 의병장을 맡았다. 비록 나이가 젊고 체구는 작았지만 담대하고 용감한 성격으로 인해 의병장에 추대된 것이다. 의병부대의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 순천을 비롯한 여러 군읍의 5일장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이때 병법에 밝은 서울 출신의 오주일(吳周一)을 영입하여 의병항쟁에 큰 도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1908년 (음)3월 안규홍 의병부대가 출범하였다. 부대장 염인서, 선봉장 이관회(李貫會)·장인보(張仁甫, 일명 張仁初), 중군장 임창모(林昌模), 후군장 안택환(安宅煥), 참모 오주일·송기휴(宋基休), 포군장 정기찬(鄭基贊), 도십장 임하중(林夏中), 유격장 신문경(申文景), 부장(部將) 손덕오·염규범(廉圭範)·유우삼(劉又三) 등 정연한 편제를 갖추었다. 이들은 대부분 보성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의 가난한 농민이거나 머슴 출신들이었다. 물론 부대장을 맡은 염인서는 지략가의 역할을 맡은 농촌지식인이었고, 중군장 임창모처럼 1909년 4월에 참여한 유생출신도 있었다. 처음 의병을 일으키려던 1908년 초와 달리 1년이 지난 뒤에는 양반 유생들도 자발적으로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비록 상하의 지시나 도움을 받지 못한 가난한 농민들이지만 애국구민(愛國救民)의 의병임을 표방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세력의 구축, 친일세력의 처단, 탐학한 관리 및 가렴주구자(苛斂誅求者) 근절 등의 활동 방향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민폐를 금지하기 위해 엄격한 군율을 정하였다. 이렇다 할 재정 기반이 없던 이들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였다. 숨은 후원자의 자발적 도움이나 악독한 지주의 소작료, 세금 탈취, 지역별 할당액 등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세무관리를 자주 공격하였으며, 악덕 지주의 소작료를 징발하여 그 일부를 가난한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친일세력의 대명사인 일진회원의 처단에 앞장섰다. 일진회원들이 일제 군경의 앞잡이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가차 없이 처단하였다. 특히 이들의 항일투쟁은 아주 강력하였다. 1908년 4월 보성군 조성면의 파청(坡靑) 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해산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일제의 군경과 침략 기구를 공격하였다. 첫 번째 전투지였던 파청에서 일본인 헌병 2명을 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후 일제 군경은 물론이거니와 주재소와 헌병대, 일본 어부 등 일제 침략 기구는 닥치는 대로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물론 이들의 피해도 적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심지어 의병 이탈자의 밀고로 기습을 받아 한꺼번에 25명의 의병이 전사하여 거의 재기 불능 상태의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는 심남일(沈南一)·전해산(全海山) 의병부대 등과 연합하여 한층 강화된 형태의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일제에 맞섰다. 주로 활동했던 지역은 보성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이었다. 광양의 백운산(白雲山)으로부터 순천의 조계산, 보성의 동소산(桐巢山), 때로는 전남 동부 연안의 도서지역에서도 활동하였다. 특히 보성은 의병부대 내 비롯한 대다수 의병들의 출신지로서 주민들도 이들을 적극 지지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 "보성군에 사는 담사리라 칭호하는 안 모가 의병을 다수 모집하여 그 군 경내에 두류하는데 주민을 침어(侵魚)하는 피해는 추호도 없다"고 보도될 정도였다. 그런 까닭에 주민들은 의병 활동을 비호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 도와주었다. 1908년 8월 보성군 문덕면 진산(眞山)에서 무려 다섯 시간 동안 혈전을 벌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점심을 제공하고 돌멩이를 날라 주며 적을 유인하는 등 의병처럼 활동하였다. 이 전투 와중에 주민 두 사람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안규홍 의병부대의 항일투쟁이 갈수록 고조되자 양반 유생들도 이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일제는 보성 복내(福內)의 임참봉(任參奉)이 가족 모두를 자진(自盡)시킨 후 집을 불사르고 안규홍 의병부대에 가담한 사례를 파악한 바 있다. 이처럼 주민들과 이른바 수미상응(首尾相應)의 돈독한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양반과 유생까지 가담하여 더욱 일제를 위협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인하여 훗날을 기약하며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 2년 동안 뛰어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보성 법화마을에서 1909년 9월 25일 붙잡히고 말았다. 1910년 6월 22일 대구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대구감옥 무연고 묘지에 방치되어 있다가 1922년에야 반장되어 현재 보성군 조성면 은곡리에 안장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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