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조
安光祚1884 ~ 1920. 7.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채응언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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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6) 충청남도 연기군(燕岐郡) 서면(西面) 월하리(月下里, 현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월하리) 출신이다. 판결문에 의하면 1919년에 36세로 1884년생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해진 자료의 한계로 그 밖에 자세한 성장 배경과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황제를 내세웠다. 그리고 곧 이어 7월 24일 이완용 내각에 강요하여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그 해 8월 1일부터 전격적으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시위대의 봉기를 계기로 다수의 해산군인이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의병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시기 채응언(蔡應彦)의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채응언은 1907년 중반 의병에 투신하여 유인석(柳麟錫)계열의 의병부대에서 일반 부대원으로 활동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08년 5월 무렵 부대장이 사망하자 부대원들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엄정한 군율을 강조하였다. 또한 소수정예의 유격전을 통해 1915년 7월 붙잡히기 전까지 황해·평안·함경·강원의 도계(道界)를 넘나들며 여러 차례 일본군경과 교전을 벌이며 일제의 치안기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908년에 황해도 안평순사주재소(安平巡査駐在所) 공격을 시작으로 도안헌병분견소(途安憲兵派遺所)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1910년 4윌 28일에는 함남 안변군(安邊郡) 마전동(馬轉洞)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일본인 순사를 총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으며, 전주(電柱) 23본을 절단하는 등 일제의 통신시설을 파괴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 13일에는 황해도 선암(仙岩)헌병분견소를 기습하여 일본인 헌병과 헌병보조원을 처단하였다. 한편 국외에서 활동한 세력과의 연계를 모색하여 1911년 11월 서간도 만간구(萬干溝)에서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이 의병을 중심으로 친목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했다. 이때 심판원을 맡은 채응언 휘하에서 박영섭 등과 함께 사무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후에도 국내로 다시 들어와 1913년 6월에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상도면(上圖面) 대동리(大同里) 헌병분견소를 공격하고, 1914년에는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평원읍(平原邑)을 비롯해 각지에서 군자금 모금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15년에는 채응언을 수행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평남 성천군(成川郡) 영천면(靈泉面) 처인리(處仁里)에 사는 부호 한정렬(韓正烈)의 집을 찾아갔을 때 밀정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출동한 일제 헌병과 조우(遭遇)하였다. 이에 채응언은 일제 헌병과 30분간 격투를 벌이다 붙잡혔다. 채응언이 일제 헌병과 격렬한 격투를 벌이는 혼란한 상황에서 가지고 있던 일본기병총으로 30발 정도 사격을 가하고 피신하였다. 이처럼 채응언 부대 소속으로 그를 수행하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을 하였고, 1915년 채응언이 붙잡혀 사망한 이후에도 독자적으로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계속 이어가다가 1919년 겨울 붙잡혔다. 1919년 12월 12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이른바 강도죄, 강도상인죄, 살인죄, 방화죄의 명목으로 사형을 받았고, 판결이 확정되어 이듬해인 1920년 7월 28일 평양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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