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근
安明根1879. 9. 17 ~ 1927. 7. 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민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105인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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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79년 (음)9월 17일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현 벽성군) 수양산 아래 광석동(廣石洞)에서 아버지 안태현(安泰鉉)과 어머니 진주 김씨(晉州 金氏)의 3남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호는 매산(梅山)이다. 고려말 유학자 안향(安珦)의 26대손이다.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의 아들 6형제 중 둘째 아들인 안태현(安泰鉉)의 3남 중 맏아들이다. 셋째 아들 안태훈(安泰勳)은 안중근의 부친이다. 안중근이 출생(1879년 9월 2일생)한 지 59일만에 태어났으며 동갑내기이다. 6살이 되던 해인 1885년 할아버지 안인수는 아들 형제와 그 일가 7~80여 명을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 청계동(淸溪洞)으로 이주하였다. 유년시절 청계동 내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성장하였다. 1897년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의 영향으로 안씨 일가 모두가 천주교에 입교하고 1898년 청계동에 천주교 본당이 설치되었고 조세프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em; 한국명 홍석구(洪錫九))이 주임 신부로 부임한 후 빌렘신부로부터 교리수업을 받았다. 1898년 11월 28일 청계동 공소를 방문한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주교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야고보(James)이다. 청계동에서 사촌형 안중근과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내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했으며 그해 12월 가문의 기둥이었던 작은 아버지 안태훈이 사망하자 1906년 사촌형 안중근을 따라 개항장인 진남포 억양기(億兩機)로 이주해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한국 군대마저 해산되는 망국 상황이 펼쳐지자 사촌형 안중근은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항쟁에 투신했을 때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전개된 안악면학회(安岳勉學會)와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의 교육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고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독립전쟁 방략에 뜻을 함께 하였다. 안중근이 사형을 선고받은 1910년 2월 14일 뤼순(旅順)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재판정에 출석한 후 귀국하여 빌렘신부에게 종부성사(終傅聖事) 받기를 부탁한 안의사의 요청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간청에도 불구하고 뮈텔주교가 빌렘신부의 뤼순행을 반대하자 끈질긴 설득으로 빌렘신부를 동반하여 뤼순감옥에서 가서 안중근에게 종부성사(終傅聖事)를 주고 마지막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또한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가 비단으로 지은 흰색 두루마기, 검은색 바지, 신발을 전달해 주었다. 안중근의 최후를 지키고 국내로 귀국한 이래 줄곧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1910년 일제로부터 강제병합이 되자 그해 12월, 신민회 간부들은 비밀리에 양기탁(梁起鐸)의 집에 모여 독립운동 기지개척을 위한 서간도 이주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함께 서간도 이주민 모집과 군자금 모금 활동에 착수하였다. 1911년 1월 11일자의 뮈텔주교는 자신의 일기에 “...빌렘신부가 총독부에 대한 조선인들의 음모가 있었는데 거기에 안야고보(안명근)가 적극적으로 관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라며 자신은 이 사실을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인 아카시(明石元二郞)를 찾아가 알렸다고 기록하였다. 이로써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신민회의 서간도 이주 계획과 무관학교 설립의 움직임이 누설되자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 조선총독부 경무부는 1911년 1월 10일에 군자금을 모금해 보관 중인 배경진(裵敬鎭)을 체포하고 군자금 9천원을 압수하였다. 이어 한순직(韓淳稷)·원행섭(元行燮)과 함께 평양역에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1910년 11월 박만준(朴晩俊)을 설득해 황해도 송화군의 부호 신석충(申錫忠)의 아들 경천(敬天)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2회에 걸쳐 3천원을 모집하였고 신천군의 부호 민병찬(閔秉瓚) 조부인 민영설(閔泳卨)을 위협해 2천원을 내준다는 승낙을 받아냈으나 붙잡히면서 무산되었다. 한편 이승길(李承吉)·배경진의 동의를 얻어 신천군 부호 이원식(李源植)에게 군자금 1만원을 요구하고 현금 6,400원과 4,000원의 출금표를 교부받았으며 1910년 12월 19일에는 원행섭·양성진(楊星鎭)·박형병(朴衡秉)·고봉수(高奉守)·한정교(韓貞敎) 등을 만나 뜻을 함께 하기로 하고 안악 읍내의 재산가의 성명과 자산의 정도, 헌병분견소 위치, 재주 일본인원수 등을 조사하고 읍내 자산가의 저택을 정찰하였다. 다음날 20일에 안악 양산학교(楊山學校)로 가서 김구(金九)·김홍량·도인권·원행섭·양성진과 모여 최명식(崔明植)·김익연(金益淵)·장윤근(張倫根)·김용제(金庸濟) 등에게 군자금 모집 계획을 말하고 동의를 얻었으며 신천군에서 동지 수십 명이 총기를 휴대하고 원조하러 올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12월 20일 밤에 신천군의 자산가 집들을 습격해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결정하고 밤 11시 경에 교외 남산의 습낙현(習樂峴)으로 갔으나 얼마 모이지 않았고, 또한 군자금을 내주기로 약조한 읍내 자산가들이 (음)12월 이전에 거액의 현금을 마련할 수 없음을 파악하고 1911년 1월 중에 거사하기로 계획을 늦추었는데, 실행에 앞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안명근사건’으로 체포된 김구는 “어느날 명근이 양산학교를 찾아와 해서지방 각군의 부호를 다수 교섭한 결과 독립자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신속하게 추렴에 응하지 않으니 안악읍의 부호 몇 집을 총기로 위협하려하니 응원지도를 청한다”하고 당시 “동지들을 모아 전신전화를 단절시키고 (황해도)각 군에 산재한 왜구를 토살하겠다”는 포부를 말했다고 한다. 이에 김구는 간곡하게 만류했으나 그 뜻을 꺾지 못한 채 작별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안명근사건’으로 체포된 관련자 160여 명은 이른바 강도 및 강도미수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법원 재판에서 종신징역을 받았다. 김구를 비롯해 이승길·김홍량·원행섭·배경진·한순옥 등 7인에게 징역 15년, 도인권(都寅權)·양성진 2인에게 징역 10년, 최익형·최명식·김용제·김익연·장윤근·고봉수·박형병·한정교 등 8인에게 징역 7년, 김도희·고정화에게 징역 2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그 외의 관련자들에게는 거주지 제한 등의 처분이 내려졌다. ‘안명근사건’을 시작으로 일제는 ‘테라우치총독모살미수사건’을 날조해 반일민족세력을 일시에 제거하고자 서북일대 인사 600여 명을 구속하였으며, 이들 중 105인이 실형을 받은 이른바 ‘105인사건’이 뒤이어 일어났다. 경성지방재판소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는데, 1911년 9월 4일 경성공소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종신징역이 확정되었다. 이후 1914년 5월에 칙령 104호에 의해 징역 20년, 1924년 5월에 칙령 10호에 의해 징역 13년 8월 9일로 두 차례 감형을 받고 1924년 4월 9일, 경성형무소에서 가출옥하였다. 모진 고문으로 인해 몸은 쇠약해졌고 왼쪽 눈의 시력을 거의 상실한 채 풀려났다. 소식을 들은 청계동 고향 인사들이 환영회를 준비했지만 일제의 금지로 환영회는 열리지 못하였다. 부친과 형제들, 그리고 처 권수산나(權修山羅)와 아들 의생과 양생은 1913년 봄에 중국 연길현 룽징(龍井) 육도구로 이사했다가 안중근의 가족들이 정착한 목릉현(穆陵縣) 팔면통(八面通)에 정착해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 후 가족은 러시아령 하바롭스크에서 3년간, 우수리스크에서 2년간 농사를 짓다가 1920년 무렵 두 아들을 중국에 남기고 홀로 친정이 있는 청계동으로 돌아왔다. 부부는 청계동에서 함께 과수재배를 하면서 지내다가 1925년 5월 가출옥 기한이 만료되자 6월경 지린성(吉林省) 이란거우현(依蘭縣; 현 흑룡강성 하얼빈시)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의 활동은 자료의 한계로 확인할 수 없으며, 만주에서 생활한 지 3년만인 1927년 7월 7일 이란거우현 팔호력(八虎力) 원가둔(袁家屯)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원가둔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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