沈容海
容海1904. 4. 18 ~ 1930. 4. 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흑기연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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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6) 1904년 4월 18일 함경북도 길주군(吉州郡) 장백면(長白面) 합포리(合浦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靑松), 이명은 심용해(沈龍海)이고 자는 여추(茹秋), 필명은 여수(如囚)이다. 심능숙(沈能淑)과 모친 여(呂)씨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근대교육을 받고 신학당(新學堂)의 훈장을 하던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14살 되던 1918년에 부친을 따라 옌지(延吉)의 용정(龍井) 교외로 이주하였고, 옌지 도립 제2중학에 입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간도 지역에서도 용정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는데, 이 때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간도지역 학교 연합 학생 독립운동단체로 조직된 충렬단(忠烈團)에 가입하여 유기석(柳基石)·박관해(朴觀海) 등과 함께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20년 일본군에 의해 ‘간도참변’이 벌어지면서 옌지 도립 제1중학으로 전학을 갔다. 1923년 제1중학을 졸업한 이후 그의 국어 선생이자 아나키스트로 학교 생활을 지원해주었던 장운책(張雲責)의 추천으로 창춘(長春) 『대동일보(大東日報)』의 기자가 되었다. 대동일보사의 편집진들 다수는 아나키스트들이었고, 그 또한 중학교와 신문사를 거치며 아나키스트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4년에는 아나키스트 계열 신문인 베이징(北京) 『국풍일보(國風日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학회(學滙)』의 편집을 맡았다. 특히 중국어와 에스페란토(Esperanto)에 뛰어나 중국의 빠진(巴金)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과의 국제교류에도 기여하였다. 그 무렵 유기석과 함께 아나키즘을 연구·선전하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10월 경 베이징(北京) 민국대학의 중국인 아나키스트 샹페이량(向培良)·빠진·가오창홍(高長虹) 등과 함께 연합하여 흑기연맹(黑旗聯盟)을 조직하였다. 흑기연맹은 1925년 봄부터 베이징 대학 총장인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민국대학 이사장 장지(張繼) 등의 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방종오(方宗鰲) 주간의 기관지 『동방잡지(東方雜誌)』을 발행하였고, 이에 참여하였다. 그 해 9월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창립된 민중사(民衆社)의 기관지 『민중(民衆)』의 발기인으로도 빠진·웨이후이린(卫惠林)·마오이풔(毛一波)와 함께 참여하였다. 천여우런(陳友仁)이 창립한 『민보(民報)』의 중문판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아나키즘을 선전·연구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1926년 3월 27일 안정근(安定根)의 지원을 받아 여군서(呂君瑞) 등과 함께 중국어로 『고려청년』을 발행·배포하였는데 이때 주간을 맡아 이를 책임졌다. 같은 해 9월에는 ‘크로포트킨연구그룹’을 만들어 각국 아나키스트 단체들과 연락하며 교류하였다. 『민보』가 정간된 후 베이징 법정(法政)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는데, 이에 1927년에는 재북경한인유학생회(在北京韓人留學生會)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편 아나키스트들뿐만 아니라 다른 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도 교류하며 협력하고자 하였다. 안정근을 비롯해 이탁(李鐸)·김승만(金承萬) 등이 피신하여 베이징 교외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들과 자주 왕래하였다. 1926년 여름에 김승만의 집에 머물다가 일본 특수공작원에게 공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그 해 겨울 안창호(安昌浩) 등 한국독립당원들이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과 민족유일당 결성을 논의하기 위해 동북지역으로 오고자 할 때 유기석의 부탁으로 일행을 수행하였다. 이후 그들이 1927년 1월 27일 동북지역 독립당원들과 회의하던 중 중국 경찰에 잡혀 길림경찰서에 구금되자 이들의 석방을 위해서 힘썼다. 1928년 여름에는 고향 길림에 돌아가 반년을 머물면서 옌볜(延邊) 교민의 실상을 고찰한 것을 「연변조사실록(延邊調査實錄)」으로 저술하였다. 이것은 1930년 초 옌볜 유일의 중국어 신문이었던 『민성보(民聲報)』에 연재되었다. 한중 관계와 변방의 중요성을 논하면서 옌볜에 민족특별자치구를 설치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 글에 대하여 ‘한국 교민 문제 의견서’로 의미 부여하고, 베이징대학 총장 리우져(劉哲)에게 보내기도 했다. 1929년 연길교섭처에서 일하면서 중국어 교육, 토지소송 상담과 변호를 하며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을 지원하였다. 1930년 4월 4일 일본 영사관 밀정으로 활동한 한인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정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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