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명순
安命淳1900. 10. 10 ~ 1919. 4.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수원군 향남면 발안장터 만세운동
- · 제암리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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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900년 10월 10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향남면(鄕南面) 제암리(堤岩里; 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수원군 향남면 발안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4월 15일 일본군에 의한 제암리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만세시위와 독립선언서 작성을 주도한 천도교·기독교·불교계 대표와 학생대표들은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기 위해서 인편을 통하여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 지역으로 전파하였다. 한편 수원군 천도교구에서는 장안면(長安面) 수촌리(水村里) 구장이자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도사였던 백낙열(白樂烈), 향남면 제암리의 천도교 전도사 안종후(安鍾厚), 그리고 팔탄면(八灘面) 고주리(古洲里)에 거주하는 김성열(金聖烈)이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수원으로 돌아온 직후부터 수원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백낙열은 수원군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해서 관내 천도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그는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열(金興烈)에게 만세시위를 주도할 천도교인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3월 16일 김흥열은 제암리 전도사 안종후와 안종린(安鍾璘)을 천도교 수원교구실로 파견하였다. 그런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수원에 거주하기 시작한 일본인이 수원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3월 16일 그날 일본인들은 소방대를 동원해서 천도교 수원교구실에 모인 천도교 인사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다. 그날 밤에는 기독교 계통의 삼일여학교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은 폭력 행위를 통해서 수원군 일대 만세시위를 선도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폭력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사전에 차단하려고 하자, 지역 주민들은 만세시위를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향남면 만세시위는 수원의 천도교 인사들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계획되었다. 수원 천도교구는 김흥열에게 향남면과 팔탄면의 만세시위를 이끌도록 했으며, 백낙열에게 장안면(長安面)과 우정면(雨汀面)의 만세시위를 계획하도록 하였다. 팔탄면(八灘面) 가재리(佳才里)에 거주하는 유림 이정근(李正根)은 백남열의 연락을 받고 김흥열이 이끄는 만세시위에 합류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31일 발안 장터에 열린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향남면 천도교 지도자 김흥열·김성열(金聖烈)·안종환(安鍾煥)·안정옥·이정근은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000여 명이 집결한 시위대의 일원으로 안상용·안관순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발안 시장 인근의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발안 시장 근처의 주재소를 비롯해서 일본인 가옥을 상대로 투석전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냈다. 이정근은 제자들과 함께 자신이 작사한 「3·1독립가」를 부르면서 시위에 합류해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일제 군경은 발안 장터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정근이 사망하였다. 발안장터의 시위는 4월 1일 저녁에도 계속되었다. 시위대는 발안 장터 인근에 위치한 일본인 가옥을 방화하였다. 저녁 7시 경 김흥열·백낙열과 이정근의 제자 등은 발안 일대에서 수원군의 봉화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말에 본격화되었던 수원군 일대의 만세시위는 일제 군경의 무력 진압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방화, 파괴, 그리고 인명사상이라는 폭력적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4월 3일 장안면과 우정면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시위대는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가 사망하기도 하였다. 수원군 일대 시위가 과격한 향상을 띠자, 만세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겠다는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의거해서 아리타(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의 소대가 수원군에 파견되었다. 4월 4일 우정면 화수리(花樹里)를 포위한 아리타 부대는 가옥에 방화하고 동네 주민들을 구타하였다. 4월 5일 새벽 장안면 수촌리를 포위한 아리타 부대는 마을 일대를 방화하고 불길에 놀라서 탈출하는 주민들을 향하여 총을 쏘았다. 그 이외에도 아리타 부대는 장안면과 우정면 일대의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였다. 4월 14일에는 송산면(松山面)·마도면(麻道面)·서신면(西新面) 일대에서 시위 참여자의 색출을 빌미로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발안장터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4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아리타 소대는 일본인 사사카(座坂)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趙熙彰)을 앞세워서 제암리에 나타났다. 아리타 부대는 주민들에게 15세 이상 남자들을 제암교회로 모이도록 하였다. 동네 주민들과 함께 제암교회로 들어갔다. 아리타 부대는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한 후, 그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사격을 마친 후 아리타 부대는 석유를 입힌 짚더미로 교회 및 가옥을 방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암교회에서 탈출한 인사들에 대한 색출과 더불어 현장에서 사살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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