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관순
安官淳미상 ~ 1919. 4.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제암리 학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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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향남면(鄕南面) 제암리(堤岩里, 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는 확인할 수 없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제암리 학살사건의 희생자로 당시 16세에 불과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만세시위와 독립선언서 낭독을 주도한 천도교·기독교·불교계 대표와 학생대표들은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기 위해서 인편을 통해서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 지역으로 전파하였다.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는 수원군의 천도교인들이 참여하였다. 팔탄면(八灘面) 고주리(古洲里)에 거주하는 김성열(金聖烈), 향남면 제암리의 천도교 전도사 안종후(安鍾厚), 그리고 장안면(長安面) 수촌리(水村里) 구장이자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도사였던 백낙열(白樂烈) 등은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수원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수원의 천도교인들은 수원군 일대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백낙열은 천도교 인사들과 회합하면서 만세시위를 협의하였으며,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열(金興烈)에게 만세시위를 주도할 인사들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3월 16일 김흥열은 제암리 전도사인 안종후와 안종린(安鍾璘)을 천도교 수원교구실로 파견하였다. 그런데 수원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인이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지역으로 일본인들의 경계가 삼엄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3월 16일 일본인들은 만세시위가 일어나기도 전에 소방대를 동원해서 수원 천도교구실을 기습해서 천도교 인사들을 구타하였다. 그 날 밤에는 개신교 계열의 삼일여학교를 습격하였다. 수원에 사는 일본인들이 주도적으로 만세시위를 사전에 차단하려고 하자, 한국인들은 일본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정책에 저항하기 위해서 만세시위를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향남면의 만세시위는 수원의 천도교 인사들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계획되었다. 수원 천도교구는 김흥열에게 향남면과 팔탄면의 만세시위를 이끌도록 했으며, 백낙열에게는 장안면과 우정면의 만세시위를 준비시켰다. 팔탄면(八灘面) 가재리(佳才里)에 거주하는 유림 이정근(李正根)은 백남열의 연락을 받고 김흥열이 이끄는 만세시위에 합류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 향남면 천도교 지도자 김흥열·김성열(金聖烈)·안종환(安鍾煥)·안정옥·이정근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발안 장터에는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였고, 이때 시위대의 일원으로 안경순·안상용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주재소를 비롯해서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발안 장터 인근에 위치한 일본인의 거주지로 가서 일본인 가옥과 주재소를 향해서 투석전을 전개하였으며, 일본인 소학교를 방화하기도 했다. 이정근은 서당 제자들과 함께 자신이 작사한 「3·1독립가」를 부르면서 시위대에 합류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군경은 향남면에서 발생한 만세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이정근이 일제 군경의 폭력적 진압으로 사망하였다. 4월 1일 저녁, 시위대는 발안 시장 일대의 일본인 가옥에 불을 질렀다. 저녁 7시 경 이정근의 제자들은 김흥열·백낙열 등과 함께 발안 시장 일대의 산에서 수원군의 봉화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발안 일대의 시위가 격화되는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발안에 거주하는 일본인 43명은 인근 삼계리로 대피하였다. 3월 말 본격화되었던 수원군 일대의 만세시위는 일제 군경의 무력 진압에 저항하면서 폭력적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4월 3일 장안면과 우정면의 만세시위에서 시위대는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가 사망하기도 하였다. 수원군 일대 시위가 과격해지자,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으로 아리타(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소대가 수원군 일원에 파견되었다. 4월 4일 아리타 소대는 우정면 화수리를 포위한 채 가옥을 불태우고 동네 사람들을 구타하였다. 4월 5일 새벽에는 장안면 수촌리를 포위하고 방화하였으며, 불길에 놀라 탈출하는 주민들을 향해서 사격하였다. 일본군은 장안면과 우정면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4월 14일 무렵에는 송산면·마도면·서신면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시위 참여자를 검거한다는 명목 아래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상대로 폭력을 자행하였다. 4월 15일 오후 2시 경 발안장터에서는 4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가 있었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동네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러자 아리타 소대는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앞세워서 제암리에 도착하였다. 아리타는 주민들에게 15세 이상 남자들을 제암교회로 모이도록 하였다. 아리타 부대의 명령에 따라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제암교회로 들어갔다. 아리타 부대는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한 후, 제암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사격을 마친 후 아리타 부대는 석유를 입힌 짚더미로 교회 및 가옥을 방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암교회에서 탈출한 인사들에 대한 색출과 더불어 현장에서 사살하기도 하였다. 아리타 소대의 학살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4월 16일 수원 일대에서 일제 군경이 조선인을 학살한 소식이 서울에 전해졌다. 서울 주재 미국총영사 버그홀쯔(L. A. Bergholz)는 커티스(R. S. Curtice) 영사에게 수원 일대에서 전개된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커티즈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 H. Underwood), AP통신 서울 특파원 테일러(A. W. Taylor)와 함께 언더우드가 운전하는 차량을 타고 수원으로 갔다. 그들은 수원군 일대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연기가 타오르는 장면을 목격하였는데, 그 장소가 바로 제암리였다. 그들은 제암리에서 일본군 학살 현장을 확인하고 그 내용을 조사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4월 17일에는 선교사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가 제암리 현장을 방문하고 일본군의 학살 내용을 조사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제암리 학살을 보고서로 작성하였으며, 그 보고서가 언론 등으로 공개됨으로써, 제암리에서 일본군의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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