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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순

安慶淳

1879 ~ 1919.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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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안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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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水原)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수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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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제암리 학살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향남면(鄕南面) 제암리(堤岩里, 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79년생으로 추정된다. 천도교인으로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에 의한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희생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해서 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만세시위와 조선독립선언서 낭독을 주도한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대표 및 학생대표들은 만세운동의 전국적인 확산을 추진하기 위해서 인편을 통해서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 지역으로 전파하였다. 수원에도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천도교인들이 있었다. 장안면(長安面) 수촌리(水村里) 구장이자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도사였던 백낙열(白樂烈), 팔탄면(八灘面) 고주리(古洲里)에 거주하는 김성열(金聖烈), 향남면 제암리의 천도교 전도사 안종후(安鍾厚) 등이 대표적 인사였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돌아온 백낙열은 천도교 인사들과 회합하면서 만세시위를 협의하고, 고주리에 거주하는 천도교 지도자 김흥열(金興烈)을 찾아가서는 만세시위를 준비할 인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3월 16일 김흥열은 제암리 전도사인 안종린(安鍾璘)과 안종후를 천도교 수원교구실로 파견하였다. 그런데 수원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인이 정치적·경제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그런 이유로 3월 16일 일본인들은 만세시위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방대와 함께 수원 천도교구실을 습격해서 천도교 인사들을 구타하였다. 그 날 밤에는 개신교 계열의 삼일여학교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수원 지역은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일본인들이 선도적으로 만세시위 계획을 무력으로 저지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일제 군경과 일본인들은 무력을 동원해서 수원에서 만세시위의 발생과 확산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으나, 한국인들은 수원군 내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격렬하게 전개함으로써 일본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정책에 저항하였다. 향남면의 만세시위는 수원군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천도교 계열이 준비하였다. 수원 천도교구에서는 천도교 지도자 김흥열과 장안면 수촌리 구장 백낙열에게 역할을 분담하였다. 먼저 김흥열은 향남면과 팔탄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도록 했으며, 백낙열은 장안면과 우정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도록 했다. 한편 백낙열의 연락을 받은 팔탄면(八灘面) 가재리(佳才里)에 거주하는 유림 이정근(李正根)도 김흥열의 만세시위 계획에 합류하였다. 이정근은 대한제국기 궁내부 주사를 지냈으며,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 낙향하여 수원군 일대에서 서당을 설립해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 향남면 천도교 지도자 김흥열과 김성열(金聖烈)·안종환(安鍾煥)·안정옥·이정근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때 천도교인으로 아들인 안상용(安相鎔)과 함께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발안 시장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본인 소학교, 일본인 상점, 일본인 가옥이 발안 시장 인근에 밀접해 있었다. 이에 발안 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주재소를 비롯해서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행진하였다. 이정근은 자신이 작사한 「3·1독립가」를 제자들과 함께 부르면서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주재소와 일본인 가옥을 대상으로 투석전을 전개하였으며,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질렀다. 출동한 일제 군경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강경하게 진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이정근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4월 1일 저녁에도 발안 일대에서 시위가 지속되었다. 시위대는 일본인 가옥에 불을 지르고, 저녁 7시 경에는 이정근의 제자들과 김흥열·백낙열 등이 발안 장터 일대의 산에서 봉화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날 봉화시위는 장안면 수촌리 개죽산의 봉화를 시작으로 수원군 일대에서 전개되었던 시위의 방식이었다. 발안 일대의 시위가 격화되는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발안 거주 일본인 43명은 인근 삼계리로 대피하였다. 3월 말 본격화된 수원군 일대의 만세시위는 일제 군경의 강경 진압에 대한 저항 과정에서 폭력적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4월 3일 장안면과 우정면의 만세시위에서는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가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자 4월 4일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의 아리타(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소대가 우정면 화수리를 포위한 채 가옥을 불태우고 동네 사람들을 구타하였다. 4월 5일 새벽에는 아리타가 이끄는 소대가 장안면 수촌리를 포위하고 방화하였으며, 불길에 놀라 탈출하는 주민들을 향해서 발포하였다. 그밖에도 일본군은 장안면과 우정면의 각 마을을 톨아다니면서 방화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탄압을 이어갔으며, 시위 참여자에 대한 폭력적인 검거도 이어갔다. 그리고 4월 14일부터는 송산면·마도면·서신면 일대의 시위 참여자에 대한 검거를 실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방화를 자행함으로써 마을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수원군 일대에서 일제 군경의 무차별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과정에서 4월 15일 발안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그 날 오후 2시 경 발안장터에서는 4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가 있었다. 천도교인으로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아들 안상용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일제 군경은 발안 장터에서 발생한 시위를 진압하였다. 시위 진압 직후 아리타 중위는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과 함께 소대를 이끌로 제암리에 나타나서 15세 이상 남성들을 제암교회로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아리타 부대의 명령에 따라서 아들 안상용, 동네 주민들과 함께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리타 부대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발포하였으며, 뒤이어 석유를 끼얹은 짚더미로 교회와 제암리 가옥 일대를 방화하였다. 아리타 부대의 학살로 현장에서 희생되었다. 이후 제암리에서 학살과 방화를 저지른 아리타 부대는 팔탄면 고주리로 이동해서 천도교인 6명을 총살하였다. 4월 16일 수원 일대에서 일제 군경이 조선인을 학살한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 주재 미국총영사 총영사 버그홀츠(L. A. Bergholz)는 커티스(R. S. Curtice) 영사에게 수원 일대 일본군 학살을 조사하도록 했다. 커티즈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 H. Underwood), AP통신 서울 특파원 테일러(A. W. Taylor)와 함께 제암리로 가서 일본군의 학살 현장을 확인하고 그 내용을 조사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4월 17일에는 선교사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도 제암리 현장을 방문하고 일본군의 학살 내용을 확인하였다. 그들이 작성한 일본군의 제암리 학살 관련 보고서가 언론 등으로 공개됨으로써, 제암리에서 일본군의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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