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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균

申祐均

1889. 6. 12 ~ 1921.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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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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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楊平)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양평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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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8) 1889년 6월 12일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양서면(楊西面) 대심리(大心里) 출신이며, 이명(異名)은 신유균(申裕均)이다. 전해진 자료의 한계로 자세한 출신 배경과 집안 내력 등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1919년 양평군 고읍면(古邑面)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1920년 양평에서 한덕리(韓悳履)와 함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경기도지단(京畿道支團)의 활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로 인해 국내에서 무장 독립운동 활동이 어려워지자 독립운동가들은 만주(滿洲)와 서간도(西間道) 등 해외로 망명하여 그 명맥을 이어갔다.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가 일어나 일제의 탄압이 강력해지자 해외 무장독립세력의 통합이 추진되는 분위기 속에서 1919년 4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과 함께 국내에서의 조직을 만들어 해외와 국내를 잇는 무장투쟁을 기도하였다. 1919년 3~4월 양평에서 한덕리, 이용준(李容俊)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조직하여 4월 3일 양평군 고읍면에서 최대현(崔大鉉)·윤기영(尹璣榮)·이보원(李輔元)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하기 위하여 모인 강상면(江上面)·강하면(江下面)·양서면·고읍면 4개 면의 주민 약 4,000명과 함께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절규하고 “읍내로 가야한다”라고 주장하는 최대현 등과 같이 군중을 인솔하며 옹암리(瓮岩里)와 용암리(龍岩里)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른 동료들은 경찰에 붙잡혔으나 다행히 서울로 도피한 끝에 1919년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사후 1927년 2월 7일 칙령(勅令) 제11호에 의하여 사면되었다.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한 후에 비밀리에 고향 양평으로 돌아와, 장로 한덕리를 만나 중국 상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황과 국내 독립운동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조선의 독립을 위해 당시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 각 단체대표 560여 명이 모여 만주에서 만들어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지부를 조직하여 함께 활동할 것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재무관(財務官) 여중현(呂仲鉉), 박성명(朴聖明) 등의 참모라고 자칭하고 한덕리를 대한독립단 경기도 지단장으로 임명해 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이에 한덕리가 수락하자 1920년 6월 16일 서울에서 독립단의 인장 2개, 『독립신문』 등의 문서, 지단장 임명장, 등사판 등을 가지고 와서 한덕리에게 건네주었다. 이어 단원 10여 명을 모집하여 부호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며 각 촌락에 독립운동 관련 문서를 배부하고 친일파들에게 협박장을 보내어 독립운동에 진력하도록 하고 상하이로 돌아갔으나 얼마 후 병에 걸려 1921년 1월 25일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1921년 6월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경기도 지단도 한덕리를 비롯한 단원들이 양평경찰서 경찰들에게 붙잡힘으로써 와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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