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관숙
安冠叔1870 ~ 1910. 3.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기삼연 의병부대
- · 정태인 의병부대
- · 호남창의회맹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6)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수곡면(水谷面) 연리(蓮里, 현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연동마을)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9년 당시 40세로, 1870년생으로 추정된다. 의병에 가담하기 이전에 직업은 석유상(石油商)이었다고 한다. 기삼연(奇參衍)의병부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삼연은 전남 장성(長城)에서 1895년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을미의병을 전개였으며, 나주(羅州)에서 많은 의병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회유에 의병을 해산시켰다.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 된 이후에는 1907년 9월 수록산(隨錄山) 석수승암(石手僧庵)에서 회맹하였고,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에 추대되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전북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교전하였으며, 1907년 12월에 의병 1백명과 함께 영광(靈光) 법성포(法聖浦)에서 세곡을 탈취하여 군량을 확보하였다. 이외에도 장성·영광·정읍(井邑)·부안(扶安) 등 전북 여러 지역에서 전과를 올렸다. 이 가운데 1907년 8월 19일부터 1907년 11월 30일까지 기삼연 의병부대에서 총 50정(挺)을 휴대하고, 의병 100명을 거느리고 전남 장성, 담양(潭陽)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져 의병들이 분산되는 가운데 일제가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전개하였고, 이 가운데 의병장 기삼연이 붙잡혀서 1908년 1월 2일, 광주(光州)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이후 호남 지역의 의병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기삼연 의병장이 사망한 이후, 1908년 2월에 정태인(鄭太仁) 의병부대에서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정태인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전남 영암군(靈巖郡) 등지에서 김재구(金在龜)·양준호(梁俊鎬)·심상일(沈南一)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이후 징역 5년을 받았다. 1908년 12월에 총 27정(挺)을 갖고, 부하 40여 명과 함께 무장군(茂長郡) 원송면(元松面) 삼태리(三台里, 현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삼태마을)에 거주하는 정모(鄭某)에게 군량미를 10석을 모집하였다. 또한 이웃 마을에서 군량미로 벼 20석을 받았다. 이후 붙잡혔고 이른바 폭동죄, 강도죄로 1909년 11월 12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0년을 받았다. 옥고를 겪던 중, 1910년 3월 2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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