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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南一

南一

1871. 2. 10 ~ 1910.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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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沈南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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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함평(咸平)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함평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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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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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71년 (음)2월 10일 전라남도 함평군(咸平郡) 대야면(大也面) 산정동(山亭洞)(현 월야면 정산리) 신기(新基)마을에서 심의봉(沈宜奉)과 진주강씨(晋州姜氏)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자는 덕홍(德弘), 본명은 수택(守澤)이다. 남일(南一)은 호인데, 남도(南道)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의미로 자호(自號)하였다. 평택 임씨(平澤林氏)와의 사이에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집안은 벼슬이 끊긴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히면서 성장하였다. 관직에 나아간 적은 없으나, 향리에서 서당 훈장으로 생활하였다. 1906년에는 함평향교(咸平鄕校)의 동재(東齋)의 색장(色掌)을 맡은 바 있는 함평의 유생이었지만, 불의와 일제의 침탈에 대해서는 적개심이 강한 성격의 이른바 선비의 기질을 타고난 전형적인 농촌지식인이었다. ‘천성(天性)과 골격(骨格)이 옥과 같은 대장부로서 재화(才華)가 출중한데다 손오(孫吳)의 병서(兵書)와 중국 고대의 협객전(俠客傳)을 많이 읽은 인물’로 알려졌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국가의 위급함을 타개하기 위해 창의하여 국권을 되찾으려 하였으나 응모자가 없었다. 명망이 높은 유생이 아닌데다 군대를 일으킬 만한 재력을 지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뒤로 미루고 이미 활동 중인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였다. 당시 전라도에서는 기삼연(奇參衍)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일제조차 이들의 활동을 신출귀몰하다고 평할 정도였다. 그런 까닭에 1908년 1월 26일과 같은 해 4월 19일에 이들을 붙잡기 위한 전담 ‘토벌대’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그 결과 호남창의회맹소의 핵심 인물들이 연이어 사망하였다. 즉, 1908년 2월 3일에는 기삼연이 체포·총살되었고, 같은 해 3월 29일에는 김율(金聿)이 붙잡혔으며, 이어 그 해 4월 25일에는 김율의 형인 김준(金準)마저 사망하였다. 1907년 말부터 다음해 봄까지 김율의 부장(部將)으로 활동하였으나 김율이 사망하자 독자적인 의병부대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전남 남평(南平, 현 나주시 남평읍) 출신의 김제현(金濟鉉)과 손을 잡고 창의소(倡義所)와 모의청(募義廳)을 남평의 운곡(雲谷)(현 나주시 봉황면 운곡리)에 설치하고 거의를 준비하였다. 고향인 함평을 비롯하여 남평·보성(寶城)·장흥(長興) 등지를 돌아다니며 한 두 사람씩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1908년 4월말에 이르러 부하 200여 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에 앞서 의병에 투신한 지 약 6개월만인 1908년 (음)2월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부대의 명칭은 ‘호남의소(湖南義所)’라고 정하였으나, 흔히 ‘남일파(南一派)’로 불렸다. 호남의소에서 활약한 주요 인물로는 선봉장 강무경(姜武景), 중군장 안찬재(安贊在)·박사화(朴士化), 후군장 노병우(盧柄友, 일명 盧雙童·盧一堂)·나성화(羅聖化), 모사장(謀士將) 권택(權澤), 도통장(都統將) 김도숙(金道淑), 기군장(起軍將) 김치홍(金致洪), 군량장(軍糧將) 이세창(李世昌), 서기 염원숙(廉元淑), 도집사 최유승(崔有承) 그리고 모천년(牟千年) 이강산(李江山) 등이다. 특이한 사실은 선봉장이 중군과 후군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의병장 심남일과 선봉장 강무경이 서로 의형제를 맺은 특별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사시 선봉장이 의병장을 대신할 수 있는 장치인 셈이다. 이들은 대체로 일정한 학식을 갖춘 농촌 출신의 유생이거나 농민 그리고 상인들이었다. 호남의소 의병들의 출신지는 함평·남평·장흥·나주(羅州) 등지였는데, 출신지를 기반삼아 주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호남의소의 편제와 직책이 확정되자,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고시하였다. 제1조에서는 의병의 지휘체계와 군율을 어긴 자에 대한 책임 소재를 밝혔다. 제2~6·8조에서는 각종 민폐(民弊)의 내용을 적시한 다음 그것을 어기면 처벌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이들이 특히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에 역점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제7조는 국가재산의 보호에 관한 것이고, 제9조는 전투시 지켜야 할 사항이며, 마지막으로 제10조는 의병의 식사시간의 준수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특히 이들은 주민의 보호를 강조했는데, "원컨대 제군들은 특히 백성을 무마하는데 힘써야 한다. 부디 토지와 재물을 빼앗지 말고, 겁략하지 말 것이며, 무고한 사람들을 때리지 말라. 그리고 경솔하게 군사를 발동하지 말고, 적을 가소롭게 보지 말라.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집안 사람을 맞이하듯 반갑게 서로 대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말라"고 했듯이, 안민적(安民的) 의병 활동을 크게 강조하였다. 간혹 민폐를 끼치거나 군율을 어긴 자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히 다스렸다. 일제측 기록에도 '부하의 비행을 엄격히 다스리고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킨 인물'이라 하였다. 호남의소에서는 일제의 국권 강탈과 경제적 침탈, 일본인 관리임명, 군대해산과 고종의 강제퇴위 등에 대하여 매우 비판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주민들에게 알렸다. 이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저지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병임을 표방하였다. 이를 위해 이들의 의병항쟁은 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로 친일세력 제거 활동으로, 세금을 독촉하는 군수와 세무관,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들을 왜적과 같은 부류로 간주하여 처단할 것임을 명시하였다. 아울러 일진회(一進會)원들로 구성된 자위단(自衛團)과 한국인 헌병보조원들도 제거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납세거부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각종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보호하는 한편, 의병활동의 재원 마련에도 도움을 받았다. 둘째로 의병을 빙자한 도적의 퇴치에 앞장섰다. 이들은 광고문을 통해 잡배(雜輩)들이 약간의 무리를 지어 의병이라 칭하고서 민재(民財)를 강탈하면 곧바로 의소(義所)에 알리거나 잡아보내라고 하였다. 이른바 ‘가의(假義)’, 즉 의병을 빙자한 도적의 퇴치에 앞장섬으로써 자신들의 의병활동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주민들로부터 한층 신뢰받을 수 있는 의병부대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셋째로 지속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전남의 나주·함평·보성·장흥·영암(靈巖)·강진(康津)·해남(海南)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는데, 나주-강진을 축(軸)으로 하는 전남의 중남부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1908년 (음)3월 강진군 오치동(五治洞, 현 강진군 강진읍 서산리)전투를 시작으로 능주(綾州) 노구두(老狗頭, 현 화순군 도곡면 평리 노구두마을), 함평 석문산(石門山), 능주 석정(石亭, 일명 乭亭, 현 화순군 춘양면 석정리), 남평 거성동(巨城洞, 현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선동마을), 보성 천동(泉洞, 현 보성군 조성면 신월2리 천동마을), 1909년 (음)7월 장흥 봉무동(鳳舞洞, 현 화순군 춘양면 가봉리) 전투에 이르기 까지 수십 회에 걸쳐서 일제 군경과 줄기차게 싸웠다. 약 1년 반 동안 항일투쟁을 전개했는데, 이때가 전라도의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이들은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 규모였는데, 대개의 경우 약 150~200명 정도였다. 그런데 독자적인 의병활동보다는 의병부대간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거나 합동작전을 중시하였다. 독자적으로 거병한 직후부터 그와 연고가 있던 의병장과 만나 연계투쟁이나 연합전선의 형성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일제의 강력한 군사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다른 의병장들이 소극적이었으나, 그 필요성은 날이 지날수록 절실해졌다. 그리하여 전남 영광(靈光)과 장성(長城) 등 전남의 서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전해산(全海山, 전수용의 이명), 전남의 보성·광양(光陽)·순천(順天) 등 동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안규홍(安圭洪) 등과 긴밀하게 협조하며 연합전선을 선도하였다. 실제로 1908년 8월 이후에는 이들과 수시로 연합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전라도 후기의병의 3대 의병장(義兵將)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에 대응하여 일제 역시 다양한 형태로 의병들을 압박하였다. 이를테면 1908년 10월에 영산포헌병분대(榮山浦憲兵分隊)의 후원 아래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정찰대(偵察隊)가 의병 진압을 목적으로 한 정찰을 실시하였다. 또한 일제는 수비대에 의한 진압작전을 수시로 실시하였다. 1909년 6월 초에는 3개월 예정으로 3개의 변장정찰대(變裝偵察隊)를 투입하여 당시 전라도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인 그를 비롯한 전해산, 안규홍 등의 근거지를 수색하였다. 또한 1909년 7월 중순에도 1개월 예정으로 11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들 역시 “주된 목적은 전해산·심남일을 죽이는데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일제측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의 근거지를 찾아내려고 혈안이었으나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이에 일제는 대규모의 군경을 동원하여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당시 가장 강력한 의병항쟁을 전개하던 전라남도의 의병들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9년 8월 말 자신을 포함한 10여 명의 의병장과 전남 강진군 모처(某處)에 모여 일본군의 군사작전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이 모임에서 전라도 의병들의 향후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09년 (음)7월 하순 호남의소의 의병을 해산하였다. 하지만 중군장 안찬재(安贊在)는 의병해산에 끝까지 반대하여 보성 출신의 임창모(林昌模)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끝까지 항거하다 전사하였다. 이후 강무경 등과 장흥과 영암·화순(和順)의 경계 지점인 풍치(風峙)에 은신해서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려 하였다. 1909년 10월 9일 이들 일행 5명은 모두 붙잡혔고, 그 이튿날인 10월 10일 ‘남한폭도대토벌작전’도 종료되었다. 일본군 제2연대 제3중대는 “전라남도 남부에 있어서 수일(首一)이라 칭하는 거괴(巨魁) 심남일 및 그 부하 유수(有數)의 수괴 강무경을 포획”한 공로로 상장을 받았다. 1909년 말 이들은 광주(光州)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아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사형이 확정된 후 대구감옥에서 의형제이자 선봉장이었던 강무경과 함께 1910년 10월 4일 교수형으로 사망하였다. 유고로는 『진지록(盡至錄)』(일명 『심남일실기』)이 전해진다. 호남의병의 연합전선의 형성을 주도한 전남 제일의 의병장으로서, 일제는 그를 ‘폭도(暴徒-의병)중에 가장 교묘한 자’라고 평했으며, 당시 전남 지방에서 '남일은 용마를 타고 날아다니며 무경은 공중에서 조화를 부리네'라는 노래가 회자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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