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남
辛興男1901. 11. 24 ~ 1932. 5.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5)
관련 사건
- · 1919년 4월 아산군 신창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5) 1901년 11월 24일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신창면(新昌面) 오목리(五木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읍내리(邑內里)로 이주하여 생활하였고,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4월 2일 이덕균(李悳均)·박태화(朴泰和)·정윤흥(鄭允興) 등과 함께 아산군 신창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아산에서는 1919년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溫陽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의 주도로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이래 4월 초까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신창면 만세시위는 4월 2일 밤 이덕균·박태화·정윤흥 등과 논의하여 실행하였다. 이날 오후 8시 경 이덕균 등 동지들과 함께 읍내리(邑內里)와 오목리의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만세시위의 취지에 공감하여 참여를 결의한 200여 명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인근의 학성산(鶴城山)으로 올라갔다. 산 정상에서 횃불을 밝히고 주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한동안 산 위에서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소극적인 방식에 만족하지 못한 이덕균이 갑자기 “면사무소로, 주재소로 갑시다. 이제부터 일제 관청을 쳐부숩시다!”라고 외쳤다. 기세가 오른 만세시위대는 이덕균의 제안에 곧바로 찬성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치면서 돌덩이를 주워들고 산 아래로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덕균 등과 함께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신창면사무소로 향했다. 박태화·이덕균·정윤흥 등과 함께 솔선하여 면사무소를 향해 투석해 장지문 2짝을 부수는 등의 습격에 참여하였다. 이후 이덕균·박태화 등과 만세시위대를 지휘해서 신창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문의 전등을 파괴하고, 이어서 신창공립보통학교로 행진하였다. 만세시위대가 행진해오자, 교장인 종방교(宗方喬)가 나와 만세시위대를 가로막았다. 오만한 자세로 즉시 만세시위를 중단하고 해산할 것을 요구하는 교장의 태도에 분노한 박태화가 학교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대와 함께 학교를 향해 격렬한 투석전을 전개하였고, 유리창과 문짝을 부쉈다. 만세시위 이후 신창면으로 출동한 일제 헌병대에게 붙잡혔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다가, 스스로 취하하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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