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902. 3. 20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북경조선유학생회(北京朝鮮留學生會)
- · 북경조선유학생구락부(北京朝鮮留學生俱樂部)
- · 신광사(新光社)
- · 혁명사(革命社)
- · 북경고려유학생회(北京高麗留學生會)
- · 해외순보사(海外旬報社)
- ·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 · 레닌주의동맹
- ·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 ·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朝鮮共産黨再組織中央幹部)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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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902년 3월 20일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 사등면(沙等面) 사등리(沙等里)에서 양필(梁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양필은 거제향교(巨濟鄕校) 장의를 역임하였고, 1911년에는 거제금융조합(巨濟金融組合)의 대표를 역임하는 등, 통영군 내에서 지역 유지로 영향력이 있었다. 사등면의 한 서당에서 4년 동안 한문을 수학하였고, 사등교회 내 소학교에서 1년간 신식 교육을 받았다. 1913년 거제보통학교에 편입, 1916년에 졸업하고, 서울로 가 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1920년에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미국 기독교회가 세운 루허중학(潞河中學)에서 수학했다. 1922년에는 베이징대학(北京大學) 문과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1923년에 조직된 북경조선유학생회(北京朝鮮留學生會)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1월 20일 베이징대학에서 ‘가까운 장래에 국산을 장려해야 일용외화를 배척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한 토론회가 개최되었는데, ‘가(可)’ 편 입장에서 토론에 참가하였다. 2월 북경조선유학생회가 분화하면서 조직된 북경조선유학생구락부(北京朝鮮留學生俱樂部)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활동을 모색하였다. 1924년 2월 1일 베이징대학 내에 신광사(新光社)라는 통신소를 설립해 ‘새 빛’이라는 뜻의 잡지 『신광(新光)』을 발간하였다. 창간호만 나오고 발행이 중지되어 소완규(蘇完奎)가 발행하던 『신인물(新人物)』과 통합을 추진하였다. 9월 무렵 국내로 돌아와서 서울·대구·의주·마산 등의 도시 지역과 고향인 통영에서 두 달여 체류하였다. 1924년 12월 1일과 8일 2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발표한 「오년만에 본 조선」을 통해 3·1운동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 정책을 비판하고 전체 운동의 장단점을 분석하였다. 같은 해 1월 설립된 북경조선대혁사(北京朝鮮大革社)를 모태로 12월 무렵 김성숙(金星淑)·장지락(張志樂, 김산)·김용찬(金容贊) 등과 혁명사(革命社)를 조직하였다. 혁명사는 1925년 1월부터 월간 잡지 『혁명(革命)』을 통해 무산 계급이 주도하는 민족해방을 지지하면서도, 좌익 민족주의 세력과의 민족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국내와 러시아, 상하이(上海) 등을 잇는 조직망 구축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24년 일제 정보 당국에 의해 의열단(義烈團) 단원으로 파악되어 감시를 받기도 하였다. 1925년 1월 북경조선유학생구락부를 북경고려유학생회(北京高麗留學生會)로 개편하는 데 동참하였다. 2월에는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에서 활동한 원세훈(元世勳), 이민창(李民昌) 등과 해외순보사(海外旬報社)를 창립하였다. 『해외순보(海外旬報)』는 ‘주지(主旨)’를 통해 제국주의 타파, 조선 민족의 고유한 문명 발휘, 민중의 신문화 건설, 평등 사회 건설을 강조하였다. 이 밖에도 잡지 『노동보(勞働報)』의 편집 발행인을 맡았다. 한편 베이징에 있으면서도 국내와의 관계를 고려해 여러 편의 글을 『동아일보』와 잡지 『개벽』에 투고하였다. 1922년 6월 6일부터 13일까지 8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중국 유학을 소개하는 「북경에서-중국유학 안내」를 투고하였고, 중국 신문화 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국 민족문화의 새로운 전기를 모색한 「신문학 건설과 한글 정리」를 『개벽』 1923년 8월호에, 그리고 「우리의 사상혁명과 과학적 태도」를 『개벽』 1924년 1월호에 투고하였다. 또한 『동아일보』 1925년 3월 2일자에 「민중 본위의 신예술관」을, 『개벽』 1925년 1월호에 서구 철학의 성격을 분석한 「근세 구미문화의 근본태도」를, 마지막으로 에세이 성격의 「만리장성 어구에서-내몽고 여행기의 일절(一節)」을 『개벽』 1923년 10월호에, 「수감(隨感) 다섯 편」을 『개벽』 1924년 5월호에 발표하였다. 1925년 8월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정치부 기자가 되었다. 같은 달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였다. 12월에는 조선공산당 상하이부 상하이 야체이카 위원이 되었다. 1926년 1월 종로경찰서에 일시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이 무렵 사회운동의 전선 통일을 주장하는 「여시아관(如是我觀)」을 『개벽』 1926년 1월호에 발표하였다. 3월 각 공산주의 그룹에 속해 있던 인물들 가운데 파벌 청산의 필요성을 공감한 이들이 결성한 레닌주의동맹에 참가하였다. 4월 19일에는 통영군에서 안재홍(安在鴻)·홍남표(洪南杓) 등과 ‘중국혁명의 전도(前途)’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였다. 9월 초부터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2월에는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로 선임되었고,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책임비서가 되었다. 『조선문단』 1925년 8월호에 쓴 「문학상으로 본 민요(民謠) 동요(童謠)와 그 채집」과 『개벽』 1926년 3월호에 이광수를 비판한 「문학의 계급성과 중간파의 몰락」 등을 통해 평론가로서 면모를 보였다. 여성 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신여성』 1926년 4월호에 「남녀 관계의 역사적 변천」 등을 투고하였다. 1927년 1월 책임비서직을 사퇴하고, 5월 레닌주의동맹의 중앙위원이 되었다.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중국 문제를 폭넓게 다뤘고, 특파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조선일보』에 11회에 걸쳐 「동란의 중국을 향하며」, 12회에 걸쳐 「로국(露國) 동방정책과 중국혁명의 특질」, 5회에 걸쳐 「반동 와중의 북경에서」, 3회에 걸쳐 「중국 국민당 중앙 전체회 결과」, 5회에 걸쳐 「상해에서 본사 특파원 양명」, 7회에 걸쳐 「중국 국민당 좌우 분열의 진의」 등을 게재하였다. 10월 중국에서 돌아와 조선공산당 선전부 부원이 되었다. 11월 초 책임비서 김준연(金俊淵)으로부터 당무와 후계당 조직 권한을 위임받았다. 김세연(金世淵)을 책임비서로 선정한 뒤 1928년 초 ‘조선공산당 제3차 검거사건’을 피해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3월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조선공산당 정치부 위원이 되었고, 제2회 중앙위원회에서는 상하이에 주재하며 코민테른과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해(韓海)와 코민테른 6차 대회에 참석할 한국 대표로 선정되어, 9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10월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조선공산당의 지부 승인을 취소한 ‘12월테제’가 채택되자, 이의번복을 촉구하는 글을 작성하였다. 12월 하순 ‘12월테제’를 가지고 돌아와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광수(高光洙) 등과 당 재건 운동 방침을 논의하고, ‘파벌 투쟁을 근절하고 노동자·농민을 기초로 당을 조직한다.’는 방침을 수용하였다. 1929년 5월 지린(吉林)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 재조직 중앙간부’(朝鮮共産黨再組織中央幹部)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공산당 재조직 중앙간부’는 국내에서 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지만 한해가 병사하고 고광수·한빈(韓斌) 등이 붙잡히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1929년 5월 이후 상하이에서 한위건(韓偉建)과 함께 『계급투쟁(階級鬪爭)』 잡지를 3호까지 발간하였다. ‘12월테제’를 번역 발표하는가 하면, ‘광우(光宇)’ 등의 필명으로 「조선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운동의 방향전환기의 이론적 실천적 과오와 그 비판」 등의 글을 썼다. 12월에는 상하이에서 김소익(金小翼)과 일본 지역 운동과의 연결을 추진하고, 일본의 무산자사(無産者社) 출판사에도 관여하였다. 1930년 3월에는 상하이에 온 고경흠(高景欽)과 당 재건 운동의 방향을 논의하였다. 한편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시기 조두원(趙斗元)의 동생인 조원숙(趙元淑)과 결혼했으나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1931년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1930년부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로부터 『계급투쟁』 발간 등이 종파적 행위로 지적받았다. 1932년 8월 ‘이강(李江)’이라는 필명으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 앞으로 「엠엘파의 정치적 견지의 비판」을, 1933년에는 「엠엘파에 대하야」라는 문서를 제출하였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연구실 학술연구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다. 1932년에는 「만주사변과 조선」, 「조선의 민족개량주의에 관하여」를 집필해 코민테른 간행물 『민족 식민지 문제 자료』에 게재하였다. 1934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외국문출판사 한글담당 직원이 되었고, 1935년 국내 잡지 『삼천리』 1935년 9월호에 「우리 민요와 문학」을 발표하였다. 9월 19일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이른바 ‘조선공산당 내 반당 그룹의 공범활동’이라는 이유로 붙잡혀 8년의 유형을 받았다. 1956년 9월 22일 소련 최고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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