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익
宋鍾翊1887. 2. 27 ~ 1956. 1. 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광학회
- · 광문사
- · 공립협회
- · 국민회
- · 대한인국민회
- · 흥사단
- · 북미실업주식회사
- · 재미한족연합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887년 2월 27일 경상북도 대구군(大邱郡) 서상면(西上面) 계산동(桂山洞, 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일대)에서 부친 송인구(宋寅球)와 모친 윤씨(尹氏)의 4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야성(冶城), 본명은 송종수(宋鍾壽)이고 아호는 우강(友江)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청년시절 의학·약학과 같은 신학문을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일본 고베(神戶)로 가서 제약회사에 근무하며 제약법을 공부하고 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아 돌아왔다. 1906년 광학사(廣學社)에서 식자기술을 배웠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대구 광문사(廣文社)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07년 11월 상하이(上海)와 캐나다 밴쿠버(Vancouver)를 경유하여, 11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다음날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였다. 1907년 12월 28일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서기에 임명되어 공립협회 사무를 보았다. 1908년 신년을 맞이하여 송종수에서 송종익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가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를 저격한 후 기소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회원들은 제2회 공동회를 열고 그들의 법정 투쟁에 대비해 재판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재무로 선임되어 재판 비용을 마련하였다. 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The San Francisco Chronicle)』지에 「일본은 자유의 적이오, 스티븐스는 공리(公理)의 적이라」는 논설을 기고하였다. 1909년 북미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국민회(國民會)로 통합된 이후, 6월 4일 국민회 북미협회와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재무 겸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12월 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1910년 5월 10일 국민회와 대동보국회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되었을 때,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서기에 임명되었다. 1912년 1월 29일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발기하고 서기와 재무를 겸직하며 쌀농사를 통해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 무렵 안창호와 흥사단(興士團) 창립을 계획하였다. 1913년 흥사단 창립 이후, 12월 20일 전체 발기인대회에서 경상도 대표로 선정되었다. 이후에도 흥사단 이사부장·의사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1919년 대한인국민회 재무로 활동하며 미국내 한인교민들의 의연금 수입을 부기하고 수합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로써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1936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표자들의 원탁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각 항일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를 재조직하고 부흥시키며, 임시정부에 지속적으로 재정적 후원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 이때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으로도 선정되었다. 이후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에 한시대(韓始大) 등과 함께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때 미주 독립운동 연합기관으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설치문제, 임시정부 봉대,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설치 문제 등을 요구하는 대회의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였다. 이 대회의 결의에 따라 1941년 8월 미주지역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미주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 후원과 외교,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1941년 12월 12일 미국 육군부의 협조로 한인국방경위대가 설립되었을 때, 대원으로 참가하였다.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에서 한인자유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미국의 국방 계획에 대한 지지와 충성을 다할 것과 임시정부·주미외교위원부·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1943년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미주지역 13개 한인단체가 대표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이 대회에 대표원으로 참석하였고 새로운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의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그 해 10월 한국 재건을 후원할 목적으로 구성된 재미한족국내파견대표단(在美韓族國內派遣代表團) 재무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4일 고국 방문 대표로 귀국하였다. 1946년 9월 15일 중도 성향 8개 정당 대표들이 신진당(新進黨)을 창당할 때,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또 그 해 9월 28일 흥사단 제1차 국내대회에서 국가 건설의 염원을 담은 「삼천만의 서원(三千萬의 誓願)」을 발표하였다. 1946년 11월 18일 미국으로 돌아가 미주 흥사단 이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명화⋮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