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방화중

邦化重

1877 ~ 1940. 12. 11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방화중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황해 안악(安岳)미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안악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14)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4) 본적은 황해도 안악(安岳)이고, 거주지는 평안남도 평양 보통문(普通門) 안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1909년 당시 30세로, 1877년생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를 두었으나, 1904년경 단신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0년 사망 당시 자녀는 한국에 있었다. 누이는 류성숙과 혼인하여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였다. 1904년 11월 11일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에 가입하였다. 상항친목회는 1903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한 단체이다. 이후 1905년 1월부터 3월까지 상항친목회에서 학무와 회계로 활동하였다. 1905년 4월 상항친목회가 민족운동을 목적으로 공립협회(共立協會)로 확대 개편되자, 공립협회 총회 임원으로 안창호를 보좌하였다. 공립협회 총회 본부인 공립관(共立館)의 사무를 맡아 1906년 7월까지 근무하였다. 11월 22일 공립협회가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창립하자 편집인이 되어 1907년 3월까지 근무하면서 기사를 일일이 직접 써서 석판(石版)으로 인쇄하였다. 1906년 6월부터는 『공립신보』 주필로도 활약하는 등 공립협회 본부의 중추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1905년 4월부터 1907년 9월까지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에서 회계 겸 학무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05년 12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에서 학생회를 조직하자 학생회에 가입하여 서기로 활동하였다. 1906년 7월 장로교 계통의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였으나 10월 매부 류성숙 등과 함께 오클랜드공립학교 소학교 과정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전도사 임무를 사임하였다. 그러나 평양의 모펫 목사의 요청으로 다시 전도사 업무를 맡아 12월부터 캘리포니아 일대를 순행하였다. 1907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장로교회를 설립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으며,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양주삼(梁柱三)·이정래(李正來, 후일 李剛으로 개명)·이교담(李交倓)·임치정(林蚩正)·오대영(吳大泳)·장라득 등 장로교·감리교·미이미교(美以美敎) 대표와 함께 「한인연합교회보 발간취지서」를 발표하고 『한인연합회보』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8월 국채보상의연금을 기부하였으며, 9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계 겸 학무를 사임하였다. 10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로스앤젤레스지방회(羅城地方會)에 가입하였다. 12월 로스앤젤레스지방회 회장 대리를 거쳐 1908년 회장으로 선임되어 1년간 활동하였다. 1908년 2월 한국에서 외국인에게 토지를 팔아먹는 악폐를 금하고 한국의 토지를 매입하여 농상공업의 기본을 삼는다는 취지로 로스앤젤레스 한인 7명과 함께 권업주식회사(勸業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자본을 모집하였다. 권업주식회사는 1908년 말 당시 주주 36명, 자본금 2,200달러, 본국 매입 전답 369두락이었고, 1911년에는 자본금이 1만 6천 달러에 달하였다. 8월 이순기·한기갑 등과 로스앤젤레스 부근 클래몬트에 집을 얻어 학생양성소를 설립하고 총무가 되어 학생양성소 사무를 총괄하였다. 2월에는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서기로 선임되었다. 1909년 2월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와 미주 공립협회가 통합하여 국민회를 창립하자, 공립협회는 북미지방총회로 개편되었다. 4월 4년간 멕시코에서 노예이민으로 고생하다 해방된 멕시코 동포들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북미지방총회로부터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황사용(黃思溶)과 함께 멕시코에 도착하였다. 5월 10일 유카탄주 메리다 지방 한인 305명을 모아 메리다지방회(美利多地方會)를 설립하도록 후원하였다.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뒤, 북미지방총회 대의원, 12월 북미지방총회 구제원으로 선출되었다. 로스앤젤레스지방회에서도 외교원으로 뽑혔다. 1910년 1월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 사옥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각지 한인 대표들과 함께 「창건보관가옥취지서(倡建報館家屋趣旨書)」를 발표하였다. 7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탄(倂呑)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이를 반대하기 위한 항일투쟁 실천기관으로 애국동맹단을 설치하였다. 8월 국민회 의무금 2달러, 12월 애국동맹단에 2달러를 기부하여 항일운동을 후원하였다. 1911년 4월 북미지방총회 학무로 선임되었다. 7월 클래몬트학생양성소 겸 예배당 건축위원으로도 활동하며 각지로부터 의연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8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이때 중앙총회 학무원이자 서기대리로도 선정되었다. 9월 미주 한인들이 평안북도 선천(宣川)에 설립한 대동고아원의 외교 주무원으로 선정되었다. 12월 대한인국민회 대의회 임시서기가 되어 의안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1912년 1월 부친의 사망소식을 듣고 2월 4일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귀국하였다가 11월 초순경 미국으로 돌아왔다. 1916년 2월 로스앤젤레스지방회 구제원, 4월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7년 5월 30일 하와이 미이미교회의 초청으로 마우이 호를 타고 호놀룰루로 건너갔다. 호놀룰루에 거주하면서 릴리하 스트리트에서 잡화상점을 경영하였다. 1918년 9월 폐교 위기에 놓인 하와이 한인중앙학원을 위해 이사부를 조직하고 이사부장직과 함께 한인중앙학원 교장직도 함께 맡아 운영하였다. 11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지방총회(布哇地方總會) 회장 안현경(安鉉卿) 등 10여 명과 함께 소약국동맹회(小弱國同盟會)와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 문제를 논의하였다. 1919년 5월 이용직·차의석·한승곤·차정석·김기창 등과 함께 미주한인학생 원동선교회(遠東宣敎會)를 만들고 하와이지방 선교를 위한 지방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1년 하와이대한인교민단(大韓人僑民團)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 1월 사업차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왔다. 2월 조소앙(趙素昻)의 외교 활동 후원을 위해 이살음(李薩音) 등이 1919년 조직한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大韓人勞動社會改進黨) 기관지 『동무』를 다시 발간할 당시 편집인으로 선임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의 기근 참상을 듣고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라성한인임시조국동포구제회를 조직하고 서기로서 500달러를 모집하여 한국의 조선기근구제회 회장 이상재(李商在)에게 보냈다.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자, 로스앤젤레스에서 송필만·정지영·안석중(安奭中) 등과 함께 공동회를 열고 구미위원부를 옹호하기로 결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1927년 3월 안석중·안상학 등 13인과 함께 로스앤젤레스흥업저금회(일명 羅城興業貯金會)를 조직하고 제1호 월보를 발행하였다. 1928년 2월 뉴욕에서 허정(許政)·장덕수(張德秀)·김도연(金度演)·김양수(金良洙)·김마리아(金瑪利)·김현구(金鉉九)·김원용(金元容)·남궁염(南宮炎) 등과 「삼일신보 창간취지서」를 발표한 데 이어 『삼일신보(三一申報)』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7월 한국대표단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세계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자, 주일학교대회대표단환영회에 재정을 지원하였다. 1940년 4월 16일 신병 치료차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팜 병원에 입원하였다. 12월 11일 팜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사망하였다. 12월 20일 오후 3시 라성한인장로교회 목사 김성락의 주례로 영결식이 거행된 후 에버그린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도훈⋮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