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규
辛宗奎1899. 11. 8 ~ 1979. 5.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4)
관련 사건
- · 1919년 이원군 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4) 1899년 11월 8일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남면(南面) 포항리(浦項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11일 이원군 남면 차호시장(遮湖市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함경남도 이원군에서의 첫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0일 서면(西面) 이원 읍내에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남면의 김탁(金鐸)·전원숙(全元淑)·변광국(邊廣國) 등은 3월 1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남면 주민들에게 시위 계획을 전달하였다. 3월 11일 오후 1시경 차호 시장에 용항리(龍項里)·하차호리(下遮湖里)·상차호리(上遮湖里)·포항리 등 남면 각 마을 주민 약 1,000여 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김탁·전원숙·장병섭(張炳涉)·강응삼(姜應三)·신병칠(辛秉七) 등과 함께 ‘조선독립국’ 깃발을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 군중은 차호시장을 출발하여 차호헌병주재소(遮湖憲兵駐在所)·면사무소·공립보통학교·기독교회당 등으로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행진 도중 김탁·최용주(崔龍周)·최관호(崔觀鎬) 등과 번갈아 가며 “모든 군중들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차호공립보통학교로 가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연설을 한 후 만세를 외쳤다. 시위 군중들은 오후 4시경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의 검거 과정 중에 붙잡혀 김탁 등 12명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정의·인도에 근거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라며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이후 다양한 사회단체에 참여하여 왕성히 활동하였다. 1920년 9월경 신만준(辛萬濬)과 함께 보통학교 수준의 여자교육강습소를 설립하여 포항리 천도교구실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1923년 6월 16일 포항리 청년회관에서 개최된 포항유희회(浦項遊戱會) 제3회 정기총회에서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25년 4월 15일 함경남도 이원청년회연합회 제4회 정기총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함경남도 청년단체에서도 활동하였다. 1925년 10월 25일 원산 노동청년회관에서 개최된 함경남도 청년연맹위원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주봉⋮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