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구
申義求1892. 12. 3 ~ 1974. 7.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광주군 광주읍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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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2년 12월 3일 전라남도 고흥군(高興郡) 고흥면(高興面) 등암리(登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에는 광주군(光州郡)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에 거주하면서 기독교계 학교인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사(敎師)로 근무하였다. 3월 10일 광주군 광주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10일 광주읍내 만세운동은 숭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지역의 만세 운동은 일본 도쿄(東京)에 유학하던 정광호(鄭光好)가 일본의 2·8독립선언 소식을 가지고 귀국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한 것이 시작이었다. 한편, 3월이 되어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한 김철(金鐵)·최정두(崔正斗)·김복현(金福鉉) 등이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崔丙浚)이 김복현·최정두 등과 접촉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는데, 숭일학교 교사인 손인식(孫仁植) 등도 뜻을 함께하여 학교 등사기를 가져다가 독립선언서 및 경고문, 독립가 등을 등사하였다. 또한 숭일학교 보통과와 고등과 학생인 정두범(鄭斗凡)·김철주(金鐵柱)·김성민(金聖敏)·김판철(金判哲)·김정수(金楨洙) 등은 인쇄된 전단을 사람들에게 배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때 숭일학교의 교사로서 학생 동원에 힘을 보탰던 것으로 추정된다. 3월 10일 오후 2시 30분, 숭일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미리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들고 광주 작은 장터가 열리는 부동교(不動橋) 아래에 모였다. 이 때 숭일학교 학생들과 함께 장터에 나아가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시위대는 이미 약 1,000여 명에 달하였으며, 양림동(楊林洞)·북문(北門)·지산면(芝山面) 방면에서도 시위대가 출발하여 광주 시내에서 합세하였다. 시내를 행진하여 우편국에 도착하자, 일제 기마 헌병은 물론, 소방대, 재향군인회 소속의 퇴직 군인 등이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에 100여 명이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오후 5시경 해산되었다. 이때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이 그대로 유지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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