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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숙

申應淑

1879. 9. 20 ~ 195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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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신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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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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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3)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3) 1879년 9월 20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동부동(東部洞)(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919년 3월 17일 예안면 예안읍 장날에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예안면 만세운동은 안동군 만세운동 중 첫 번째로 일어난 대규모 시위였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이지만, 세 곳에서 동시에 만세운동을 준비한 것에도 그 배경이 있었다. 조수인(趙修仁)을 중심으로 한 유림계열과 신응한(申應漢) 등 예안 만촌교회 신도들이 주축이 된 기독교 계열, 그리고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이 주도한 세력들이 모두 3월 17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이끈 인물은 면장 신상면으로, 그는 이시교(李時敎)·이광호(李洸鎬) 등과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치밀하게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17일, 거사 당일 예안읍 장터에 있다가 오후 3시 30분경 예안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서 ‘독립만세’ 소리를 듣게 되었다. 2~30여 명의 사람들이 「대전기념비(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이들의 만세소리에 세 곳에서 동시에 100여 명의 사람들이 쏟아지듯 나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소리에 호응하여 주저 없이 시위에 동참하였다. 군중들과 함께 장터를 누비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유림들과 기독교도들도 만세운동에 합세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군중의 수는 늘어났다. 이에 힘입어 다른 시위대와 함께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그러나 시위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은 수비대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주도인물 15명을 현장에서 체포하고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잠시 흩어졌다가 다른 군중들과 함께 다시 만세시위를 논의한 끝에 경찰관주재소로 향하기로 결정하였다. 오후 6시경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주재소 앞에 이르러 1,5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한 목소리로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주재소 진입을 시도하였다. 경찰이 폭력을 휘두르며 진입을 가로 막자 돌과 기왓장을 던지며 주재소 문으로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주재소 문과 유리창을 부수며 구속자 탈환을 시도하였지만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경찰이 수비대를 동원하여 공포를 쏘면서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켜 만세시위는 끝을 맺게 되었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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