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두
申應斗1891. 3. 2 ~ 1945. 5.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9)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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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9) 1891년 3월 2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녹전면(祿轉面) 구송동(九松洞)에서 태어났다. 이후 예안면(禮安面) 서부동(西部洞)으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919년 당시 무역상(貿易商)을 하고 있었으며, 3월 17일 안동군 예안면 예안 장날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예안면 만세운동을 처음 계획한 인물은 이웃마을 동부동(東部洞)에 사는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이었다. 3월 11일 저녁 9시 경 예안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신상면·이시교(李時敎)·이광호(李洸鎬)·이중원(李中元)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3월 17일 예안읍 장터에서 거사를 실행하기로 하였다. 이후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면사무소 숙직실에 모여 시위 때 쓸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또한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규합하는 등 만세운동 준비에 진력을 다하였다. 이들과 별도로 조수인(趙修仁) 등의 유림과 신응한(申應漢) 등의 예안 만촌교회 기독교도들도 3월 17일에 만세시위를 펼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거사 당일인 3월 17일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예안읍 장터로 향하였다. 다른 주도 인물들과 세 곳으로 나뉘어 장터 주변에서 시위 참여자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오후 3시 30분경 예안면사무소 뒷편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20~30여 명의 군중이 일제가 세운 다이쇼(大正) 일왕 즉위 축하 기념비(어대전기념비 (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린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로 장터에서 군중들을 이끌고 장터 중앙으로 달려 나와,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유림과 기독교도들이 합세하고 장꾼과 주민들도 시위에 동참하면서 만세운동은 대규모로 발전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사기가 높아져 시위대를 이끌고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동봉(李東鳳)과 함께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길가의 학생과 주민들도 시위대를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다. 시위대와 함께 경찰과 수비대의 포위를 뚫고 행진하자 시위가 확산될 것을 우려한 경찰이 길을 막고 주도 인물 15명을 체포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진압에 일단 잠시 해산하였다. 오후 6시 경 이시교·안병극(安炳極) 등과 함께 구속자 석방을 위하여 만세시위대를 재조직하였다. 1,5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다시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 앞에 이르러 시위대와 함께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주재소 진입을 시도하였다. 폭력을 휘두르며 막는 경찰에 대항하여 투석전을 벌이며 주재소 안으로 진입하여 주재소 문과 유리창을 부수면서 구속자 탈환을 위하여 격렬하게 대항하였다. 이에 경찰은 더 많은 수비대를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맞섰고 공포를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조수인·이맹호(李孟鎬) 등이 수비병의 총검에 찔려 부상을 입었고 다른 25명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그해 6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형량이 징역 10월로 다소 낮아졌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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