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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휴

申聖休

1891. 8. 16 ~ 1955.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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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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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淸州)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청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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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청주군 미원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1년 8월 16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낭성면(琅城面) 귀래리(歸來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30·31일까지 이틀 연속으로 진행된 청주군 미원면(米院面)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청주군 미원면 만세운동은 3월 30일부터 31일까지 이틀에 걸쳐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3월 30일의 만세시위는 미원면의 신경구(申敬求)·이용실(李容實)·이수란(李水蘭) 등이, 다음날인 31일의 만세시위는 낭성면(琅城面)의 오교선(吳敎善)·박우동(朴雨東) 등이 주도하였다. 3월 30일 미원장터의 장날에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전개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날 마을 주민들과 함께 미원장터로 나와 만세운동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미원장터의 중심부 4거리에서 오후 2시경, 신경구 등이 태극기를 들고 장터에 나온 주민들에게 격렬한 어조로 한국이 반드시 독립되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들의 호소에 호응하여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신경구 등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와 함께 미원장터를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였다. 헌병군조(憲兵軍曹) 쇼쿠다(植田利之助) 등의 일제 헌병들은 즉각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동안 시위대의 규모는 1,5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소수에 불과했던 일제 헌병들은 청주에 지원 병력을 요청하는 동시에 만세시위의 주도자 중 한사람이었던 신경구를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신경구를 강제 연행한 일제 헌병대에 분노하여 이용실의 지휘에 따라 헌병주재소로 달려가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헌병주재소장은 시위대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수란 등이 일제 헌병주재소장의 태도에 거세게 항의하였다. 일제 헌병들은 이들도 체포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 헌병대의 태도에 더욱 격분한 이용실이 시위대를 향해 “주재소를 파괴하라”, “주재소장을 죽여라”라고 외치면서 솔선하여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에 호응하여 시위대의 선두에서 이성호(李聖浩)·이서구(李瑞九) 등과 함께 “만세를 외치는데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라고 일제 헌병에 따지고, “주재소를 전멸시켜야 한다”고 시위대를 격앙시켰다. 이후 곧바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주재소의 시설과 집기 등을 파괴하였다. 미원면의 일제 헌병들은 청주의 헌병들이 도착하자마자, 시위대를 향해 총기 발포로 대응하면서 만세시위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6월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같은 해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6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 해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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