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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근

朴宗根

1892. 12. 12 ~ 1923.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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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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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이원(利原)노령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이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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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국민회
  • · 시베리아한인교육회
  • · 국민대표회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1892년 12월 12일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동면(東面) 용암리(龍岩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월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주하였고, 지린성(吉林省) 창바이현(長白縣)으로 옮겨 거주하면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통신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12월에는 시베리아조선인교육연구회가 출범하였을 때 취지서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연해주에서는 1920년 9월에 발표된 소비에트 교육령에 따라 한인 학교들이 시교육위원회에 편제되었으나, 한인들은 나름대로 시베리아를 침공한 일본군 철병 이후를 대비하여 식민지 교육으로 오염된 한인 학교들을 정리하고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1921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학제 통일, 의무교육 실시, 보통학교 시설과 증설, 사회 교육 진작 등을 목적으로 시베리아조선인교육연구회를 설립하고자 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1월 10일부터 17일까지 신한촌(新韓村) 한민학교(韓民學校)에서 82개 학교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시베리아조선인교육연구회 총회에서 이강(李剛) 등과 함께 의사부원에 선임되었다. 1923년 1월 10일에는 『독립신문』에 시베리아교육회 대표로 「시베리아 한인교육(西伯利亞 韓人敎育)에 대하여」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22년 11월 11일 시베리아교육회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출발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 설립 문제와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총 74차례 회의가 개최되었다. 1922년 11월 말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하이에 도착해 “우리는 이번 국민대표회에 많은 희망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왔다. 이번 국민대표회가 잘 모여 다 일치한 보조로 나가게 되면 우리의 사업은 속히 성공할 것이다”라며 회의 참여의 소감을 밝혔다. 이후 진행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여러 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13일 임시서기로 지명된 배천택(裴天澤)과 박건병(朴健秉)이 각각 신병(身病)과 사면청원 제출 등으로 불출석하자 ‘임시서기’로 임명되었다. 1월 18일에는 김철(金澈) 등과 함께 정식 간부 조직을 위한 선거에서 ‘투표지 검사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월 19일에는 비서장 선출과 겸하여 실시된 3인의 비서 선출 선거에서 박완朴完 등과 함께 초선투표 결과 후보자가 되었지만 결선투표를 통과하지 못하였다. 1월 22일에는 정식으로 5인의 자격심사위원을 선거하는 투표에서 정신(鄭信)·정광호(鄭光好) 등과 함께 ‘대표자격심사위원’으로 당선되었다. 2월 6일에는 정학수(鄭鶴壽)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6분과 2위원회 가운데 교육분과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교육분과위원회에서는 “조국 광복의 정신하에서 건전한 시대 인물 양성, 최신교육의 원리를 응용해 우리민족에 적합한 특수 교육 병행, 만 7세~13세까지 의무교육, 중앙교육기관에서 교과용 도서 최단기간내 편찬·발행”한다는 교육방침을 정하여 독립운동 수행을 위한 인재 양성을 교육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였다. 이 교육방침은 1923년 5월 10일 국민대표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국민대표회의 각 분과의 의인을 둘러싼 활발한 토론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를 유지하여 개선하자는 입장의 개조파와 새로운 최고기관을 만들자는 창조파로 의견이 나뉘어 1923년 5월 15일부터 사실상 결렬되었다. 이 때 창조파에 속해 활동하였다. 창조파는 그 해 5월 말 임시정부와 교섭을 추진하였지만 이마저도 성사되지 않았다. 1923년 6월 7일 창조파만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국민위원회를 기초로 한 위원제 정부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독립운동 최고 지도기관으로 삼을 것을 결정하고 임시헌법을 제정 반포하였다. 이 날 국민위원회의 국민위원 33인, 국무위원 5인(4인만 선출), 고문 30인 등을 선출하였는데, 국민위원회 국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이 신정부 수립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고, 임시정부 내무총장 김구가 내무령(內務令) 제1호를 통해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6개월에 걸친 회의는 끝났다. 1923년 러시아로 건너간 이후에는 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을 위해 헌신하였다. 1924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제12학교 졸업식에서 학교 연혁과 학사 보고를 하였고, 1925년 블라디보스토크 공산당 7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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