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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덕인

孫德仁

1884 ~ 1961.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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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손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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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7)

관련 사건

  • · 교민단총회관 점령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7) 출신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자료에 따르면 1884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약재상으로 1905년 멕시코로 이민을 갔고, 미국 본토를 거쳐 1916년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 릴리하(Liliha)에서 고려약국과 와이키키(Waikiki)에서 여관 사업을 하면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군무원으로, 1921년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는 1922년 3월 2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민단령(僑民團令)」에 따라 하와이 대한인교민단(大韓人僑民團)으로 바꾸었다. 1928년 2월 교민단·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중립자들로 구성된 대한민족통일촉성회(大韓民族統一促兌會) 결성을 주도하며, 하와이의 독립운동 단일기관 창설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28년 교민단 부단장으로, 1929년엔 부단장과 총단장을 겸임하였다. 특히 광주학생운동 이후로 일제의 침략이 확대되자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고,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Herbert C. Hoover)에게 탄원서를 보내 “만주와 한반도 문제에 미국과 국제연맹의 적극적 개입을 호소”하였다. 1930년에는 교민단 총단장으로 선출되어 하와이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193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는 교민단과 동지회(同志會)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었다. 1931년에는 이른바 ‘교민단총회관 점령사건’과 이승만의 회계감사 등 법정 소송문제가 불거지면서 대립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교민단에 수십만 달러의 재정 소요를 불러와 하와이 한인사회 발전에 지장을 주었다. 이때 총단장으로서 갈등과 문제를 조정하는데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고, 1933년 교민단을 국민회로 복설시켰다. 1937년 10월 31일 국민회와 동지회 간 합동을 위해 각 단체 대표들과 협의할 때 “합동의 절대 필요” 의사를 표하는 등 분열되어 있던 하와이 한인사회를 결속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극기에 관심이 많아, 하와이 국민회 기관지 『국민보(國民報)』에 태극기의 뜻을 설명하는 글을 여러 차례 게재하여 그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간은 각 대관들이나 외국 영공사를 방문하는 사람들만 그 뜻을 알고 있었고 나라의 경사에도 각 관청에만 국기를 게양할 수 있었다. 태극기의 뜻을 시민들에게 광포하지 않고 시민의 집에 국기를 달지 못하고, 학교 교과서에도 태극기의 뜻이 기록되지 않았다”며 이에 태극기 제작자부터, 그 역사를 설명하여 모든 한인들이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부인 손마리아는 대한인부인회 중앙부장을 맡았고, 장남 손허버트는 미 대륙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미국 국방부에서 근무하였다. 1956년 와이키키를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고, 1961년 5월 1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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