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孫炳烈

孫炳

1889 ~ 1923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孫炳烈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미상노령방면

관련 단체

  • · 사할린의용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관련 사건

  • · 자유시참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2) 1923년 사망 당시 35세였던 것으로 보아 1889년생으로 추정된다.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는 확인할 수 없다. 사할린의용대 장교로 활동하였다.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한인 독립군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은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일본의 공격을 피하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한인 부대들은 러시아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 그 외에도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성립된 니항군대(泥港軍)와 이르쿠츠크에서 생겨난 자유대대(自由大隊)도 자유시에 모여 있었다. 다양한 부대가 모인 자유시에서는 두 계열의 부대가 군지휘권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였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간도지역에서 온 한인부대와 니항군대를 규합하여 사할린의용대를 만들었다. 이때 사할린의용대 장교로 활동했다. 반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자유대대를 극동공화국의 인민혁명군의 휘하에 배속시켜 고려혁명군정의회를 통해 군지휘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1921년 6월 21일 사할린의용대의 장교들과 함께 김하석(金河錫)·최고려(崔高麗)·오하묵(吳夏默) 3인을 그대로 두고는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복종할 수 없다는 뜻의 혈서를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칼라다리쉬빌리(Н. 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에게 제출하였다. 6월 22일 칼란다리쉬빌리는 전군을 집합시켰고, 사할린의용대원들은 최고려의 퇴진을 요구했으나, 최고려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고, 사할린의용대와 자유대대 사이에 일시적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통합된 고려혁명군의 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사할린의용대의 불만이 생겨났다. 6월 26일 고려혁명군정의회는 고려혁명군 편제 명령서를 발부하여 사할린의용대를 축소하였다.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사할린의용대의 핵심인 니항부대를 간도와 연해주에서 온 무장부대들과 분리시키고자 하였다. 사할린의용대의 장병들은 이러한 군 편성안에 저항하여 니항부대를 간도에서 온 부대와 분리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칼란다리쉬빌리는 결국 사할린의용대에 대한 무장해제를 결정하였다. 1921년 6월 28일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요청으로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수라젭카(Суражевка)에 주둔하던 사할린의용대를 비롯한 한인 무장부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단행하였다. 29연대는 수라젭카 평원을 포위하고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사할린의용대와 함께 최고려·김하석·오하묵 등을 축출할 것을 다시 한 번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월 28일 오후 2시부터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무장해제를 진행하였다. 무장해제에 저항하였으나 오후 4시경 결국 항복하였다. 포로로 잡힌 이들은 864명이었다. 항복한 이후 고려혁명군정의회에 의해서 재판에 넘겨졌으며, 중범죄자 72명 중 한 명으로 분류되었다. 이들과 함께 7월 30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재판은 1921년 11월까지 계속되었다. 1921년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자유시사변 피고인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판결을 받은 이들은 50명이었다. 이후 옥고를 치르다 1923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송영화⋮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