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철
申鉉喆1892. 5. 14 ~ 1943. 9.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관련 사건
- · 1919년 원주시 소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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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5) 1892년 5월 14일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소초면(所草面) 평장리(平庄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월 5일 소초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원주군 소초면 만세운동의 발단은 4월 1일 횡성군(橫城郡)에서 일어난 횡성읍 만세운동이었다. 횡성읍 만세운동은 횡성군과 인접한 소초면 마을 주민들도 많이 참여한 만세시위였다. 그런데, 횡성읍 만세운동에서 이웃 마을 둔둔리(屯屯里)에 사는 하영현(河永賢)과 강사문(姜士文)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다른 소초면 주민들과 함께 두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에 격분하였다. 4월 3일, 둔둔리 사람들은 두 사람의 시신을 마을로 운구하여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4월 4일, 둔둔리 주민 중 서당 훈도(訓導)를 하던 박영하(朴英夏)로부터 횡성읍 만세시위에서 일본이 자행한 폭력에 항거할 것을 결심하고 함께 만세시위를 펼칠 것을 제안한 서신을 받았다. 박영하의 서신을 받자 망설임 없이 동참의 뜻을 전하였고, 다음날 만세운동을 위하여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동생 신현성(申鉉成)에게 마을 청년들을 모아 시위계획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유재경(柳在景)·김흥렬(金興烈)·장세규(張世奎)·이순이(李淳伊)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하였다. 만세운동 소식은 평장리를 비롯한 면내의 여러 마을에 전해졌으며, 하영현·강사문의 순국으로 촉발된 주민들의 항일의지가 만세운동 동참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주민들이 뜻을 함께 하였다. 한편, 박영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평장리·의관리(衣冠里)·장양리(長陽里)·교항리(橋項里) 등지에 뿌렸다. 격문에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면 죽음 속에서도 삶의 길을 찾느니라”, “원수의 노예가 되어 한 하늘을 일 것인가, 유사무생(有死無生)하게 된 기막힌 운명 민족정기 가다듬어 자주독립 외쳐 보세”라고 써서 주민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을 담았다. 거사 당일인 4월 5일 아침, 약속 장소인 부채고개로 향하였다. 당시 면사무소 길목에 있는 부채고개에는 만세운동을 위하여 소초면 주민 수백여 명이 모였다. 박영하·신현성 등 주동자들과 같이 고개 위에서 주민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면사무소로 나아갔다. 동생 신현성이 평장리 주민들을, 박영하·심의성(沈宜聖)·김동선(金東先)·김동혁(金東赫) 등이 각각 둔둔리·장양리·교항리·의관리 주민들을 이끌었다. 정오 무렵, 면사무소에 이르러 면장 남상철(南相喆)을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어서 박영하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에 시위대와 함께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선두에서 군중들을 이끌고 면사무소와 그 주위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는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펼쳤으며, 이후 자진 귀가하면서 만세운동도 마무리되었다. 뒤늦게 만세운동 소식을 알게 된 일본은 마을을 수색하여 박영하 등 참여자들을 체포, 구금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를 기각하였다. 다시 한번 상고하면서 상고 취의문에 “자신의 행위가 우리 민족으로서 정의(正義)와 인도(人道)에 근거한 의사이기 때문에 범죄가 되지 않으며, 유죄판결은 부당하다”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1919년 7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였다.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 수용되어 옥고를 겪었다. 이듬해인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혼인으로 내려진 은사령(恩赦令)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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