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구
申學求1877. 7. 3 ~ 1968. 2.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청주군 미원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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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7년 7월 3일 충청북도 청원군(淸原郡) 낭성면(琅城面, 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歸來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30일부터 31일까지 낭성면과 이웃한 청주군(淸州郡) 미원면(米院面) 미원장터에서 이루어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미원면 만세운동은 신경구(申敬求)·이용실(李容實)·이수란(李水蘭)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거사일인 3월 30일 오전 미원장터 인근 김태복(金泰復)의 자택에서 회합하여 최종적으로 만세운동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오후 2시경 장터로 나갔다. 이용실이 가지고 온 태극기를 신경구가 치켜들어 흔들면서 장터의 사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변에 있던 20여 명의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등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장날 미원장터에 나왔다가 신경구 등이 시작한 만세시위를 보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시위에 참여하라는 이들의 호소에 크게 공감하여 주변에 있던 주민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신경구 등의 지휘에 따라 미원장터 곳곳을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곧이어 헌병군조(憲兵軍曹) 우에다(植田利之助) 등 미원면 주재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즉시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신경구 등의 지휘에 따라 일제 헌병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한 1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더욱 격렬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이와 같은 만세 시위대의 모습에 감격한 주민들이 속속 동참함에 따라 만세 시위대의 규모는 시간이 갈수록 불어나서 1,5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에 즉각적인 만세시위의 해산이 어렵다고 판단한 일제 헌병들은 신경구를 만세운동의 중심인물로 지목하여 헌병주재소로 강제 연행하였다. 이는 만세시위대를 크게 자극하였다. 이용실과 이수란의 지휘에 따라 1,500여 명의 만세시위대와 함께 헌병주재소로 달려가서 신경구 등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이수란은 주재소로 쳐들어가 옷을 풀어헤치고 죽일테면 죽여보라고 외치며 소지한 담뱃대를 휘둘러 주재소장을 구타하려 하였고, 성규원(成奎垣)은 일제 헌병들에게 "어째서 시위 군중을 살상하는가"라고 거세게 항의하였다. 윤인보(尹仁甫)는 맨손으로 일제 헌병의 대검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럼에도 주재소장은 연행자 석방 요구에 불응하고, 주재소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에 더욱 분노한 이용실이 "주재소를 파괴하라", "주재소장을 죽여라"라고 외치면서 솔선하여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신호로 삼아 다른 주민들과 함께 일제히 돌을 던지며 주재소 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대의 공격에 주재소 유리창과 장지문 등이 부서졌고, 주재소의 정문 기둥과 담장이 붕괴되는 등 각종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주재소가 파괴되는 상황에서도 주재소장은 여전히 연행자의 석방을 거부하면서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끌었고, 분노한 만세시위대는 주재소장과 일제 헌병을 구타하였다. 일제는 청주의 헌병들을 증원 병력으로 파견하였다. 일제 헌병들은 미원 장터에 도착하자마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면서 만세 시위를 강제 해산시켰다. 일제 헌병대의 발포로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1명이 사망하고, 3명의 부상자가 나오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이에 놀란 많은 주민들이 해산하려 하자, 신정식(申鼎植)·서정렬(徐正烈) 등과 함께 지팡이와 곤봉을 들고 만세시위에서 이탈하려는 사람들을 붙들고 정의의 대열에 참가하도록 설득하였다. 이날 미원주재소의 헌병들은 1,500여 명에 이르는 만세 시위대의 공격에 중과부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으나, 중심 인물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시위대가 해산하자, 곧바로 만세시위 주도 인물들에 대한 검거 활동을 전개하여 시위 직후 14명을 체포했는데, 이때 이수란·성규원·이용실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럼에도 미원장터의 만세시위는 다음날인 3월 31일에도 계속되었다.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와 주재소 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10월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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