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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특실

申特實

1900. 3. 17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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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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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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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평양(平壤)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평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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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4)

관련 사건

  • · 1919년 서울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4) 1900년 3월 17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아청리(衙廳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신덕심(申悳心)이다. 1919년 당시 이화학당(梨花學堂) 학생으로, 3월 1일과 3월 5일 서울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이 서거하자 이화학당 학생들은 스스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다. 한편 2월 8일 도쿄(東京)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해졌다. 이미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사를 접했던 서울의 전문학교 학생들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金元璧),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이용설(李容卨)·김문진(金文珍), 경성공업전문학교의 김대우(金大羽),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김형기(金炯璣)·한위건(韓律健),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졸업생 주익(朱翼) 등이 학생대표로 독립선언서 작성과 만세시위를 기획하였다. 2월 20일 학생 대표들은 서울 숭동(勝洞) 예배당에서 제1회 학생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2월 23일 경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만세시위를 기획하였던 박희도(朴熙道)는 김원벽에게 3월 1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할 계획을 전달하였다.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정동(貞洞) 예배당 구내 이필주(季弼柱) 목사집에 모여서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 집결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지연·학연 등을 이용해서 전문학교 뿐만 아니라 중등학교 재학생들에게도 3월 1일 만세시위 계획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였다. 2월 28일 이화학당 학생의 정기 모임에서 3월 1일 탑골 공원의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2·8독립선언서 발표 이후 학생들과 민족지도자들을 예의주시하였던 일제 당국은 2월 28일 밤중에 서울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하였다. 이에 일제 군경은 3월 1일 오전 10시를 전후로 수색을 전개하였으며,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민족대표 33인은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학생들은 3월 1일 오후 2시 경에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화학당 학생으로 노예달(盧禮達)과 함께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柳寬順)·서명학(徐明學)·김복순·김희자·국현숙은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입고 대한문 앞에서 곡을 한 후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3월 5일 아침부터 학생단 대표들이 주도하는 서울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5,000여 명이 넘은 시위대는 남대문에서 일제 군경과 충돌이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康基德)과 김원벽이 체포되었다. 이후에도 학생들과 함께 대한문 앞과 남대문에서 붉은 천을 휘두르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일 탑골공원 시위와 3월 5일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는 명목으로 일제 군경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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