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홍
申泰鴻1887. 8. 5 ~ 1951. 9. 1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6)
관련 사건
- · 1919년 안악군 용문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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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6) 1887년 8월 5일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안악면(安岳面) 금정리(金亭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신발을 파는 상인으로 3월 29일 안악면 용문면(龍門面) 동창리(東蒼里)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발발하자 안악군의 일제 군경은 안악의거와 105인사건 가담자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동시에 안악읍의 예수교회 목사 염도선(廉道善), 장로 함덕희(咸德羲), 개신교인 차응두(車應斗)·최제풍(崔濟豊)을 대상으로 사전 검속을 단행함으로써 만세시위를 차단하고자 했다. 일제 군경의 감시 속에서 안악군에서는 3월 11일 은홍면(銀紅面) 온정시장(溫井市場)의 만세시위를 제외하고는 3월 말까지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다가 3월 28일부터 안악군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재개되었다. 3월 26일 정오 무렵 안악읍내 예수교회당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29일 용문면 동창리(東蒼里)에서는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 학생, 기독교인과 상인이 중심이 되어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본래 동창리 만세시위는 3월 초순부터 계획되었는데, 계획 초기 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 9일 동창포야소교회(東蒼浦耶蘇敎會) 장로로서 명신학원(明信學園)을 운영하고 재봉업(裁縫業)에 종사했던 임성근(林成根), 초물(草物) 판매에 종사했던 김상건(金尙乾), 재봉업에 종사했던 표창현(表昌鉉)과 함께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180장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교회 임원들은 인근 철광석 광산 노동자들이 시위에 가담할 경우 폭력화할 우려가 있다면서 임성근 등과 함께 추진한 만세시위를 반대하였다. 그로 인해 동창리 만세시위를 잠정적으로 연기하였는데, 동창헌병주재소 측에서는 안악읍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광산 노동자들의 집회를 금지하였으며, 안악군 일대 학교는 방학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자 임성근·김상건·표창현과 함께 동창리에 장날이 서는 3월 29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3월 29일 오후 12시 30분 무렵 동창포예수교회 부속 배영학교(培英學校) 학생들을 비롯하여 기독교인 16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시위대는 5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명신학원에 재학중인 여학생 및 졸업생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데 그 무렵 동창리 일대를 행군 중이었던 일제 보병이 동창헌병주재소 헌병들과 합세해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을 연행하였다. 연행된 인사 중 여성 3명이 그 날 밤 9시에 석방되었는데, 그들을 통해서 일제 군경이 연행한 인사들에게 가혹행위를 가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3월 30일 동창헌병주재소로 가서 항의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동창리 만세시위에 주도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1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서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항소를 기각하였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그 해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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