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의
申泰義1901. 3. 5 ~ 1974. 10.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3)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강화군 부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3) 1901년 3월 5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길직리(吉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직업은 잡화상(雜貨商)이었으며,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府內面, 현 강화읍)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18일은 부내 장날이었고, 만 명이 넘는 군중이 참여하는 대규모 만세운동이 진행되었다. 강화군 부내면 만세운동은 길상면 온수리(溫水里)에서 금은세공업에 종사하던 유봉진(劉鳳鎭)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유봉진은 연희전문학교 학생인 황도문(黃道文)에게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길직리 교회에서 목사 이진형(李鎭亨)·황유부(黃有富)·황도문 등과 회합을 통하여 만세운동을 구체화하였다. 한편으로 염성오(廉成五)·장윤백(張允伯)·황유부는 만세운동을 독려하는 '강화 인민에게', '독립가'라는 문서를 200~250장 정도 제작하여 기독교도 연락망을 통해 배포하였다. 운동 당일 오후 2시, 성공회 신학 공부를 하던 중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시위의 선두에는 말을 탄 유봉진이 '결사대 유봉진'이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앞장섰다. 이때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군청으로 나아가 군수 이봉종(李鳳鍾)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쳐라”라고 위협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어서 객사로 가서 만세를 불렀고, 공자묘(孔子廟)로 갔는데 시위 군중은 2만 명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오후 5시, 경찰서에 체포된 유희철(劉熙哲) 등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서에 나아갔다. 그리고 “구금자를 석방하라. 시장에서 칼을 뺀 김 순사보를 인도하라”라며 경찰을 압박하였고, 끝내 검거자들을 석방시켰다. 밤 8시 30분, 경찰의 해산 명령으로 잠시 흩어졌지만, 다시 시장에 집결하여 만세를 외치는 등 밤늦게까지 시위를 계속하였다. 3월 19일, 일제는 용산(龍山)에서 장교 이하 군인 40여 명을 강화에 파견하였고, 시위 참가자 63명이 체포될 때 함께 붙잡혔다. 이후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남석⋮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