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균
申世均1890. 4. 26 ~ 1948. 9.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4월 평산군 세곡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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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0년 4월 26일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세곡면(細谷面) 금리(金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월 2일 평산군 세곡면 누천리(漏川里) 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평산군 만세운동 초기 전파는 천도교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하기에 앞서 평산군 출신인 이동락(李東洛)에게 고향으로 가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라는 제안이 있었다. 이동락은 3월 2일 평산군에 도착했지만 일제 헌병의 거주 제한 명령으로 활동이 어려웠다. 이에 이동락은 금천군(金川郡)에 거주하던 천도교인 강창선(姜昌善)과 연락을 취해 평산군 만세운동을 은밀히 추진하였다. 3월 7일과 8일 이틀에 걸친 만세운동 이후 일제 헌병대의 강경 진압과 감시로 평산군 만세운동은 한동안 침체기에 빠졌다. 3월 말에 만세운동이 절정에 이르면서 평산군에서도 만세시위가 재개되었다. 그리고 4월 2일 세곡면 누천리 장터에서도 만세운동이 열렸는데 이때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세곡면에서는 시위 며칠 전부터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에 태극기가 게양되었으며, 그로 인해 일제 관헌은 세곡면 일대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헌영(崔憲永)·이대성(李大成)·이원영(李元永)·민홍식(閔弘植)·신상균(申祥均) 등과 함께 4월 2일 누천 장날을 맞이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들과 함께 4월 2일 오후 3시 무렵 누천 장터에서 700명이 모인 가운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헌병분견소 앞으로 행진하였다. 일제 헌병이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하자, 격문한 시위대는 분견소로 진입해서 유리창을 부수고 분견소장의 얼굴을 가격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으며, 그로 인해 현장에서 시위대 3명이 즉사하였다. 이후 일제의 검거활동으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2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국민으로서 자기나라의 독립사건에 대해 기쁨을 금할 길 없어서 군중과 만세를 부른 것은 죄가 아니라면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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