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균
申鳳均1866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1919년 평산군 인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6)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상월면(上月面) 대촌리(大村里) 출신이다. 1919년 고등법원 판결문에 54세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1866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4월 1일 평산군 인산면(麟山面) 시위에 참여할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안주·의주·선천·원산·진남포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천도교는 각 지역 천도교구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했다. 평산군 출신 이동락(李東洛)은 고향으로 가서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지시받았다. 3월 2일 이동락은 평산군에 도착하였지만 일제 헌병대에 의해서 거주제한 및 엄중한 감시를 당하게 되었다. 이에 이동락은 금천군(金川郡)에 거주하는 천도교인 강창선(姜昌善)에게 만세시위를 추진하도록 하였다. 3월 7일 평산읍 장날을 맞이하여 천도교인들은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평산읍 사람들은 일제 헌병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튿날인 3월 8일에도 장터를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강경 진압으로 평산군에서는 3월 말까지 만세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평산군 내 만세시위는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3월 말에 재개되었다. 3월 30일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라는 문구가 적힌 전단이 평산읍의 은담리(隱潭里)와 빙고리(氷庫里)에 붙여졌다. 그리고 3월 31일 평산군 내에서는 장날을 맞이한 인산면 기린리(麒麟里)와 금암면(金岩面) 한포리(汗浦里)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일명 기린장 시위로 일컫는 인산면 기린리의 만세시위는 3월 31일~4월 1일 양일에 걸쳐서 전개되었다. 3월 31일 오후 1시 경 면서기였던 서홍균(徐洪均)를 비롯해 엄윤영(嚴允榮)·정학규(鄭學奎)·김예식(金禮植)·김두우(金斗牛)·서용하(徐用河)·신만균(申萬均)·조봉성(趙鳳成) 등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장터 일대를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150~600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이 날 시위는 인산면과 상월면(上月面) 주민들과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였다. 일제 헌병은 기린장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였다. 일제의 강경 진압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인 4월 1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4월 1일 기린장 장터에서 계속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날 시위에는 300~400여 명의 시위대가 함께 하였다.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기린헌병주재소로 진출하였다. 그 곳에서 일제의 무력 진압을 규탄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저항하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사격을 가하였다. 일제 헌병의 사격으로 시위에 참여한 3명이 사망하였으며, 그 밖의 참여자들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후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과 소요죄, 상해죄 등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지만, 1919년 7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러자 시위 참여의 당위성을 국권 회복에서 찾으면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고 체포한 일제 헌병과 시위대에 고문과 구타를 통해서 허위 자백을 이끌어낸 주재소원의 행위를 고발하면서 상고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상고가 기각되어 징역 2년의 원심이 확정되었다. 이로 인하여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