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묵
宋養默1882. 1. 1 ~ 1945. 8.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1919년 평안남도 평양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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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1882년 1월 1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전구리(磚九里)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기독교이며, 1911년 무렵부터 감리교(監理敎)에서 운영하는 학교인 평양 광성학교(光成學校)에서 한문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평양 만세 운동은 서울의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에 발맞추어 준비되었다. 평양의 천도교·장로교·감리교 계열이 동시에 서울에서 열리는 독립선언식에 맞추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감리교는 평양 채관리교회(釵貫里敎會) 목사 주기원(周基元), 이향리교회(履鄕里敎會) 목사 김찬흥(金燦興),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목사 박석훈(朴錫薰) 등이 중심이 되어 준비하였다. 2월 26일 채관리교회 기도회에서 목사 주기원으로부터 3월 1일의 시위 계획을 전해 들었으며, 시위 당일에 교회 소속 학교인 광성학교 학생들도 함께 동원하여 줄 것을 부탁받았다. 3월 1일 오후 1시 남산현교회에는 사전에 소식을 듣고 모인 교인들이 고종의 추도식 및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때 광성학교 학생 30여 명을 이끌고 집회에 참석하였다. 고종의 추도식이 끝난 후 김찬흥 목사의 사회로 독립선언식이 시작되었고, 독립선언서를 주기원 목사가 낭독하였으며, 곧바로 박석훈 목사의 연설이 이어졌다. 이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대가 시내로 나아가기 시작하자 다른 시위대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시위 행렬은 영창여관(永昌旅館) 골목을 지나 남문 거리 앞의 평양경찰서로 이어졌으며, 그 곳에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행진해 온 장로교도와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출발한 천도교도 등이 합류하였다. 경찰서 앞에서 일제 헌병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시위가 과격해 질 기미가 보이자, 독립선언의 취지에 따라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시위대를 제지하기도 하였다. 이후 3월 2일부터 일제의 만세시위 관련자 검거가 이어지면서 결국 붙잡혔고, 헌병에게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이 일로 일자미상일에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4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5월 1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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