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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일

宋士一

1874. 9. 15 ~ 1935.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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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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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天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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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충청남도 천안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4년 9월 15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북면(北面) 명덕리(命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병천(竝川)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은 19명의 순국자와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여 1919년 만세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만세시위 중 하나이다. 이 만세운동은 병천 지역의 유중권(柳重權)·유관순(柳寬順)·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 등과 수신면(修身面)의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 등이 주도하였다. 서울 이화학당(梨花學堂)의 학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유관순은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1919년 3월 13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이들은 3월 16일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柳重權)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이백하(李伯夏) 등 지역 인사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병천의 만세운동을 제안하였다. 지역 유지들이 만세운동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고, 아우내 장터의 장날인 4월 1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매일 밤 예배당에서 주민들에게 배포할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4월 1일을 기다렸다. 수신면(修身面)에서는 조금 늦은 3월 29일경 홍일선·김교선·이순구(李旬求)·박영학(朴永學)·한동규(韓東圭)·이백하 등을 중심으로 4월 1일 아우내 장터의 장날에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2개의 만세운동 계획은 3월말 김상훈(金相勳)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3월 31일 밤 매봉산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 수신면(修身面) 산마루, 충북 진천(鎭川)의 고갯마루에 봉화가 올랐다. 이것은 다음날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신호였다. 이를 확인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4월 1일 아침 집을 나섰다. 장터로 향하는 길목에서 사람들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호소하며 태극기를 배포하고 있던 조병호(趙炳鎬)·조만형(趙萬衡)·박봉래(朴鳳來) 등으로부터 태극기를 받아 옷 속에 숨기고 장터로 들어가 만세운동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장터의 한가운데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일제히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품 속에 감추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주도 인물들의 지휘에 따라 만세시위에 동참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고야마(小山) 소장 이하 5명의 헌병들이 곧바로 출동하여 시위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3,000여 명의 만세시위대에 비해 출동한 일제 헌병은 5명에 불과하였다. 만세시위대는 해산 명령에 불응하고 더욱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당황한 일제 헌병의 발포로 김상헌(金相憲)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철수하는 일제 헌병들을 쫓아가 주재소 습격에 참여하였다.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일제 헌병의 발포에 격렬하게 책임 추궁을 하였다. 평화 시위임을 강조하는 조인원의 설득으로 시위대는 잠시 진정되는 듯 했으나, 일제 헌병이 다시 발포하여 유관순은 부상당했고, 그의 부친 유중권이 사망하였다. 또다시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김교선 등이 이끄는 100여 명의 주민들이 주재소로 쳐들어가 유치장 벽을 부수고 구금자를 석방하였다. 이를 보고 주재소 앞으로 다시금 3,000여 명의 주민들이 운집하였다. 이들과 함께 주재소에 대한 습격을 계속하여 건물의 뒷담을 허물고,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주재소를 대부분 파괴하였다. 만세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천안에서 고우(甲) 대위 이하 철도엄호대 6명을 아우내 장터로 급파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병천 헌병들과 합세하여 만세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이러한 일제의 무력 탄압에 맞서 시위대의 선두에서 저항하다가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1년과 벌금 20원, 노역장 유치 20일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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