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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숙

宋鳳淑

1892. 11. 3 ~ 1920.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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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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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瑞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서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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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충청남도 서산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2년 11월 3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현재 당진시 대호지면) 두산리(杜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송봉식(宋鳳植)이라는 이명이 있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4월 4일 충청남도 서산군 대호지면과 정미면(貞美面)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진에서는 3월 10일 오후 3시경 면천보통학교 학생 130여 명이 학교를 지나 면천경찰관주재소 앞으로 행진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충남지방 최초 학생만세운동이었고 당진에서 전개된 최초의 만세운동이었다. 이후 3월 16일 일경들의 사전 탐지로 만세운동이 제지되었다. 그러나 4월 2일부터 4월 8일까지 7일 동안 군내 각지에서 만세운동과 횃불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서산의 대호지면·정미면에서는 4월 4일 송재만(宋在萬)·이인정(李寅正)·남주원(南柱元)·남성우(南成祐) 등이 면민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남주원·남상락(南相洛)·남계창(南啓昌) 등의 지역 유림들은 2월말 경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서울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을 서산에 전하였다. 3월 26일 대호지면사무소에서 면서기 김동운(金東雲)·강태훈(姜泰壎)·민재봉(閔載鳳)과 면소사 송재만 등이 회합을 가졌다. 이때 김동운이 “각 지방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서산군에서도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다른 지방에 대해 부끄러운 것이다. 따라서 서산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자”고 발의해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합의하였다. 이어 다음날 3월 27일 오후 4시경 면사무소에서 재차 집합해 김동운이 “4월 4일 오전 8시경까지 도로 수선을 하러 각 집에서 1명씩 면사무소로 집합하라는 공문을 작성해 각 마을 구장들에게 배포해 면민을 집합시키고 마침 장날인 정미면의 천의시장에 가서 만세를 부르자”는 제안을 했고, 여기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4월 2일 강태훈이 결의 내용대로 공문을 작성하고 송재만이 등사판으로 인쇄한 후에 강태훈이 면장의 직인을 찍어 공문을 완결하였다. 4월 3일에는 송재만이 9개 마을의 구장 집으로 가서 「도로보수병목정리(道路補修並木整理)의 건(件)」이라는 공문서를 전달하며 주민들에게 알려 면사무소로 집합하도록 당부하였다. 밤에는 도호의숙과 반곡서당에서 훈장을 하고 있는 한운석(韓雲錫)을 면사무소로 초빙해 ‘애국가(愛國歌)’의 작사를 부탁하였다. 이어 완성된 애국가 약 400장을 등사·인쇄하고, 흰 광목으로 대형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4월 4일 아침 공문에 의거해 400여 명의 면민들이 면사무소로 집합하였다. 이때 적서리 (赤鼠里)주민 수십 명과 함께 대호지면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장 이인정은 면민들에게 “여러분이 여기에 모인 것은 도로 수선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함이다”, “조선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여러분은 이에 찬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르며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향하자”는 연설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다른 면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선두에 앞세우고 천의시장으로 이동하였다. 송재만 등은 만세 행진 중에 군중들에게 애국가를 배포하였다. 대호지면에서 천의면으로 지나는 마을마다 만세행렬에 주민들이 참여하여, 군중들은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전 11시경 천의시장에 도착한 만세 군중은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주도 인물들의 연설을 듣고 시장에 있던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 일대를 활보하였다. 천의경찰관주재소 순사 우에하라(上原)·순사보 유기우(柳冀祐)·이재영(李在英)이 시장으로 출동하여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1,000여 명의 군중들은 해산을 거부하고 시장과 주변 언덕에서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일부는 면사무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의 위세에 압도당한 일제 경찰은 진압을 포기하고 방관만 했고, 군중들도 시장을 중심으로 인근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급보를 접한 당진경찰서의 니노미아(二宮)·다카시마(高島) 순사가 오후 4시경 천의에 도착하였다. 순사들이 태극기를 압수하려고 하자, 군중들이 맞서 충돌이 생겼다. 군중들은 “어찌하여 우리 일을 막으려 하느냐? 결판을 내야 하겠다”고 소리치며 순사들에게 돌을 던졌다. 남태우(南泰祐)·김팔윤(金八允) 등이 니노미아·다카시마 순사를 논 가운데로 떠밀었다. 이때 우에하라는 군중들을 해산시키려고 적극 나섰지만 제지하지 못하였다. 결국에 파견 순사 2명이 발포하여 군중 4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격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자, 순사 3명은 주재소로 도주하였다. 군중들도 순사들을 뒤쫓아 주재소로 가서 돌을 던지고 각종 시설과 기물들을 파손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재소 앞 도로에서 돌멩이를 집어 던져 문·문패·문등·게시판 등 시설물들을 파괴하였다. 군중들의 공격적 행동에 위험을 느낀 순사들은 주재소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성난 군중들은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를 쫓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한인 순사보를 붙잡아 막대기로 구타하였다. 이 일로 1919년 5월 3일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소요죄, 공문서 위조 행사죄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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