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
申瑛澈1917. 8. 5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춘천고등학교 무명그룹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2) 1917년 8월 5일 강원도 춘천군(春川郡) 신북면(新北面) 신산리(新山里)에서 태어났다. 1935년 공립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춘천군 동산면(東山面) 서기와 강원도 김화군(金化郡) 고원으로 일하였다. 이미 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부터 친교를 맺고 지내던 이홍래(李鴻來)로부터 민족주의 관련 서적을 빌려 탐독하면서 독립을 희망하게 되었다. 같은 학교 1년 후배인 박우홍(朴禹弘)·이종식(李鍾植) 등과도 친교를 맺었다. 1936년 8월 이홍래·박우홍 등과 함께 이종식의 집에 모였다. 이때 이홍래는 “현재의 농촌은 극도로 피폐해서 조선 민족은 타락(墮落)되어 있으므로 동 민족을 개조해서 그 지위 향상을 꾀해 조선을 독립시켜 장래 세계를 통일하는데 충분한 대 민족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함께 있던 세 사람은 이에 찬동하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 비밀결사 ‘무명(無名)그룹’을 조직하였다. 무명그룹의 회원들은 자신들과 주의를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하고, 이들은 전부 귀농한 다음 농민운동에 종사해서 농민에게 민족주의를 주입시키고, 또한 일요일, 축제일 기타 공휴일에는 회합하여 협의할 것을 각각 결의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을 제국주의 일본의 굴레에서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1937년 9월에는 다시 이종식의 집 뒷산에서 회합하였는데, 이때 “우리들 조선 민족을 현재와 같은 불명예스런 생활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이 먼저 사리사욕을 초월해야 하고 또 조선 고유의 문화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고, 동지들의 동의를 얻어 그 목적의 실행에 관해 논의하였다. 이들은 다시 1938년 3월 춘천읍 진평리에 있는 수도 수원지 부근 모래밭에서 회합하였는데, 이때 “우리들이 농민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이 수양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조선문(한글)의 연구 및 보급에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역설하였다. 이때 동지들의 동의를 얻어 각자 서울의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발행한 잡지 『한글』을 구독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해 9월 24일 무명그룹 회원들과 신북면 우두리 우두산의 조양문에서 회합하였는데, 이때 박승간(朴勝侃) 외 1명과 춘천중학교 학생인 이연호(李淵湖) 외 6명에게 「조선의 형상」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들의 원대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우리가 민족문화의 재건을 꾀하는데 있다”는 뜻의 20분간 연설하였는데, 여기서 현실에서 벗어나 독립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당시 공립 춘천중학교는 한국과 일본 학생이 같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학교 당국이 한국인 학생들에게 차별적인 처사를 했기 때문에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시도하였으나 사전에 탐지되어 실패하였다. 동맹휴학 주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 회원들과 함께 토론회를 열거나 강좌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결과 춘천경찰서에서는 이를 탐지하고 같은 해 10월 19일부터 무명그룹 관련자를 일제히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법서사였던 아버지 신구현(申九鉉)의 보조자로 일하고 있다가 붙잡혀, 1939년 4월 19일 송치되었다. 1940년 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재곤⋮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